Bravobo
Friday, November 17, 2006
Wednesday, November 15, 2006
Tuesday, November 14, 2006
장자의 사유체계에 드러난 동북아 예술의 미학 - 이정우
사물들이 나타난다는 것, 그들을 볼 수 있고 그들에 대해 사유할 수 있다는 것, 본 것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이자 행복이다. 존재의 빛 속에서 출렁이는 사물들은 예술가의 영감을 통해 물감 속에서, 돌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철학자들은 존재를 사유한다. 미술과 철학의 교차로들에서 존재, 그리고 존재가 내뿜는 빛이 사유와 문화의 차원으로 번역된다. 존재의 빛은 마음속에 접히고 그 주름은 다시 문화로 펼쳐진다. 이제 이런 담론사적 사건들이 발생했던 교차로들을 더듬어보자.
사진/ 난초를 그린 <사군자>.
중국을 비롯한 동북아의 예술을 특징짓는 것들 중 하나로 사물의 세세한 점들을 솎아내고 그 구조만을, 더 나아가 그 구조까지도 솎아내고 그 힘(=力能)만을 표현해내는 점을 들 수 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달마 그림이나 커다란 붓으로 단번에 휘갈겨 쓴 글씨, 몇번의 붓질만으로 그린 난초 그림 등은 다른 예술 전통에서 쉽게 찾아보기 힘든 독특함을 지니고 있다. 이런 특징들은 어떤 사유로부터 솟아오르는가? 우리는 장자(莊子)에게서 동북아 예술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공통된 미학의 실마리를 읽어낼 수 있다.
“기술에서 시작해 도로 나아간다”
<장자>, ‘양생주’에 등장하는 포정이 소 잡는 이야기는 미학적 맥락에서 읽을 때 또다른 맛을 만끽할 수 있다. 유명한 요리사인 포정이 양나라의 문혜군을 위해서 소를 잡은 적이 있다. 손으로 꽉 잡고, 어깨로 받치고, 발을 굳게 디디고, 무릎을 구부리면서 놀라운 솜씨로 소를 잡았는데, 그때 나는 소리가 상림지무(桑林之舞)와 경수지회(經首之會)에 들어맞았다 한다(상림지무와 경수지회는 옛 음악을 말함). 양혜군이 그 모습을 보고 놀라 기술이 어떻게 그런 경지에까지 도달할 수 있는가 하고 물었다. 그때 포정은 이후 동북아 미학사상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대답을 내어놓는다. “제가 추구하는 것은 도(道)입니다. 기술에서 시작해 도로 나아가는 것이죠.”
기술에서 도로 나아간다는 것은 형이하에서 형이상으로, 물체를 다루는 손에서 마음으로 나아감을 뜻한다. 그 과정을 포정은 이렇게 말한다. “제가 처음으로 소를 잡았을 때는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분간이 가지 않았습니다. 3년이 지나자 비로소 소 전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제는 소를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느낍니다. 감각기관으로 파악하기를 그치고 온몸이 흘러가는 대로 맡기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온몸’으로 번역한 ‘신’(神)은 마음까지 포함한다. <내경>에서 신은 기(氣)를 통어(通御)한다고 했거니와, 온몸의 기가 신에 의해 통어됨으로써 신체 각 부분의 기능적 활동을 넘어 온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경지를 가리키고 있다. 이것이 곧 기술을 넘어 도로 나아간 경지이다.
감각을 통한 지각과 신체적 훈련, 물체에 대한 경험이 오랫동안 성숙하면 급기야는 정신적 차원으로 상승하게 되고(여기에서 ‘정신’이란 본래의 한의학적-기학적 의미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물(物)과 심(心)의 경계가 없어져 혼연일체의 상태가 된다. 그때 사물에 대한 꼼꼼한 관찰이나 계산, 분석 등을 넘어 몰아(沒我)의 경지에서 사물을 대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경지에로의 상승은 또한 기술의 초월뿐만 아니라 사심(私心 또는 邪心)의 초월도 요구한다. 즉, 몸이 점차 대상과 합일해가는 과정 못지않게 마음의 때를 씻고 사물을 순수하게 볼 것을 요구한다. ‘달생’(達生)에 등장하는 재경의 이야기는 이 점을 말하고 있다.
목공예의 명장인 재경이 그 놀라운 재능의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악기를 만들기 전에 먼저 기를 모읍니다. 그리고 반드시 몸을 깨끗이 해 마음을 맑게 합니다. 사흘을 재계(齋戒)하면 상이나 벼슬에 대한 욕망이 사라지고, 닷새를 재계하면 명예를 좇고 비난을 피하려는 마음이 사라지고, 이레를 재계하면 제 몸까지도 놓아버리는 경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재경은 이런 경지가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작업을 시작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곧 ‘마음을 씻는 것’(心齋)을 말한다. 몸이 감각기관들의 부분적 기능을 넘어 사물과 합체하고, 마음이 모든 때를 씻어내어 순수를 찾을 때 위대한 예술가가 탄생하는 것이다.
텅 비움을 얻으려면 마음을 씻어라
사진/ <달마도>
‘인간세’(人間世)에서는 안회와 공자의 대화라는 형식을 빌려 심재가 설명된다. 안회가 심재에 대해 묻자, 공자는 이렇게 답한다. “뜻(志)을 하나로 모은다면, 귀로 듣기보다는 마음으로 듣고 마음으로 듣기보다는 기로 듣는다네.… 기야말로 텅 비우고 사물을 대할 수 있는 존재이지. 오로지 도만이 텅 비움(虛)을 이룰 수 있고, 이 텅 비움이야말로 바로 마음을 씻는 것이라네.” 사심을 버리고 뜻을 순수하게 할 때, 신체의 부분적 기능이나 마음의 때를 벗어 기로서 사물을 대할 수 있다. 기로서 사물을 대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텅 비우고 대하는 것이며, 도가 그 과정을 이끌 때만이 그런 허(虛)의 단계에 도달할 수 있다. 바로 그런 과정이 마음-씻음 즉 심재의 과정이다.
장자의 사유에서 분명하게 나타나지는 않지만 심재의 과정은 또한 마음속의 범주들(categories)을 무너뜨리는 과정이기도 하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일정한 범주적 틀이 존재하며, 그 틀을 통해서 사물들을 본다. 즉, 사물들을 진정으로 보기 이전에 이미 범주가 작동한다. 그리고 그 범주-틀은 많은 경우 경험을 통해서 형성되기보다는 이미 개념적으로 정리된 사유의 수용을 통해서 형성된다. 그때 사람은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사물을 대하기보다는 다른 곳에서 형성되었고 자신에게 주입된 틀을 그 사물에 투사한다. 범주란 기본적으로 동일성의 체계이다. 사사로운 차이들을 솎아내고 일반화함으로써 동일성의 체계가 형성된다. 그러나 사물들의 세심한 차이들에 주목하는 사람이 예술가가 된다. 나무의 변화에 민감한 사람이 목수가 되고, 얼굴의 차이들에 민감한 사람이 초상화를 그린다. 심재의 과정이란 마음속의 격자들을 무너뜨리는 과정이며, 격자가 무너질 때마다 사물들은 그때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추한 육체를 소유한 자들의 덕을 칭송하는 「덕충부(德充符)」의 이야기는 이런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미(美)란 규격화된 몸과 규격화된 마음을 벗어나 사물을 사물 자체로서 순수하게 대할 때 성립하는 것이다.
예술의 경지는 마음의 깨달음에 달렸다
예술이란 기술에서 출발한다. 서구에서는 기술과 예술이 혼합된 ‘테크네’(techn)에서 출발했으며, 중국에서는 ‘여섯 가지 기능’(六藝)에서 출발했다. 지금도 예술은 우선 기술적 숙련과 토대를 요구한다. 일상생활에서의 평범한 예술은 대개 기술적 경지를 통해서 성립한다. 그러나 예술의 좀더 차원 높은 경지는 기(技)를 도(道)로 승화시키는 데에 있다. 이 도는 (서구의 경우처럼) 지적인 경지를 뜻하기보다는 오히려 마음의 깨달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술의 비롯한 모든 분야들이 자본주의와 대중문화의 공세 아래에서 신음하고 있는 오늘날, 사판이 이판을 압도하는 오늘날, 장자에서 연원하는 동북아의 고전적인 예술관을 되돌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필자 이정우(42)씨는 충북 영동에서 태어나 서강대 철학과 교수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현재는 철학아카데미 원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담론의 공간><가로지르기><인간의 얼굴><시뮬라크르의 시대><삶·죽음·운명><접힘과 펼쳐짐> 등이 있다
기원상의 논란은 있지만, 예술은 관찰과 기술에서 탄생했다. 관찰을 낯선 사물을 응시하는 정신적 활동이라고 한다면, 기술은 생활에 유용한 도구를 만들기 위한 육체적 활동이다.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문자도 관찰의 산물이다. 상형문자가 여기에 속한다. 사물의 관찰과 그 추상화 형태가 상형문자다. 인류사 초기에 문자는 그림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음성문자가 고착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그런데 문자가 발명되면서 문자는 문자 이상의 의미를 표현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은 이후의 일이다. 그래서 언어 자체에는 실용성과 비실용성의 의미가 모두 들어 있다.
관찰에 의해 문자가 발명되었다면, 기술에 의해 도구가 발명되었다. 그런데 도구를 만든다는 것은 유용성을 목적으로 하는데, 도구를 만드는 과정에서 유용성과는 다른 요소가 첨가되기 시작했다. 예컨대 화살촉의 경우에도 그 모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짐승을 잘 잡을 수 있도록 끝이 뾰족하면 그만인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예쁘게 만들곤 했다. 발견된 화살촉만 하더라도 수백가지 종류라고 한다. 꾸민 인위적 흔적이 유용한 도구에 나타나 있다.
관찰과 기술은 실용적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항상 비실용적 목적을 동반하고 있다. 인류가 자기 생존을 위해 관찰과 기술이라는 생존활동을 영위하는 과정에서 항상 실용성 이상의 무엇인가가 나타났다. 한자라는 문자의 경우에도 서예라는 예술적 형태를 얻었고 화살촉이라는 기술의 경우에도 예쁜 화살촉이 만들어졌다. 이렇게 생존활동 과정에서 등장한 비실용적 측면이 예술이라는 형태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술은 생존을 위한 실용적 목적에서 나온 부산물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예술을 아무리 비실용적이라 해도 근원적으로 실용적인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비실용성이 실용성에서 연유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예술은 처음부터 생존을 영위하는 수단에 불과했던 것이다.
관찰과 기술의 실용적 측면과 비실용적 측면이 분리되면서 비실용적 측면이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 아름다움이 자체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지는 않았다. 단지 생존 활동 과정에서 나타난 비실용적 측면에 불과하지, 지금 생각하는 아름다움의 내용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고대 원시사회에서 통칭 아름다움이라 부르는 것은 대체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즉 인간의 감각을 벗어나 있는 초감각적인 것이나 자연의 위력과 같은 숭고하고 두려운 경외의 대상을 의미했다.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표현하는 도구가 필요하게 되자 관찰과 기술의 비실용적 측면, 즉 예술이 적격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이란 신도 되고 정신도 되고 조화와 비례도 된다. 그래서 문자와 예술은 항상 '잉여'의 기능을 담당한다.
'잉여'를 포함하는 문자의 기능을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집트에 테우트(Theuth)라는 신에 있는데, 수, 산술, 기하학, 천문학, 장기와 주사위 놀이, 그리고 특히 문자를 창안했다고 한다. 테베에 살고 있던 이집트 왕 태양왕 타무스(Thamus)에게 테우트가 찾아와서 자신의 발명품을 보여주고 이집트인들에게 보급하라고 말했다. 특히 문자는 기억력(mneme)력을 증진시키는, 기억과 지식(Sophos)의 파르마콘(Pharmakon)이라고 자랑했다. 파르마콘은 독과 약을 동시에 의미한다. 타무스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타무스는 문자가 도리어 사람들을 망각하게 만들뿐이라고 말한다. 문자를 사용하게 되면 기억을 실행시키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Psyche) 속에 망각(Lethe)을 산출할 뿐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진리(Aletheia)가 아니라 지혜의 가상(Doxa)만을 보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 무지하게 되는데도 지혜로운 것처럼 보일 뿐이다.
Jacques Derrida' s Deconstruction
Jacques Derrida' s Deconstruction
(해체주의)
1. 생애
▶ 그의 고등사범학교 학창시절(1950년대)이나 교수시절(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마르크시즘이 맹위를 떨치던 시기. 그는 마르크스주의와 현실 공산주의에 반대하면서도 보수적 ·반동적 동기로 중도 우파나 공화파의 입장에서 마르크시즘을 보지 않는 사람 가운데 하나.→그의 해체는 어떠한 소속, 이론적 당파, 교조성도 거부하며 자신의 자유 주장하고, 철학적 선입견과 투쟁. 1968년 데모행렬에 참가하지만 5월 사태에 대해 유보적인 태도를 취함. 그는 자동혁명론이나 자연주의적 유토피아란 환상을 거부. 1970-80년대 당시 동구권 반체제 인사들을 지원.
▶ 데리다(1930-)는 우상파괴주의자; 기존 서구철학이 주장한 모든 진리를 우상으로 보고 철저히 파괴하고자 함. 데리다는 우상을 현전(現前)의 형이상학, 또는 로고스 중심주의로 부름. 이것은 가상적 세계를 넘어선 순수한 본질의 세계(플라톤), 객관을 인식하는 선험적이고 순수한 주관(데카르트 이래의 관념론), 의식으로부터 독립되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객관적 물질의 세계(유물론), 주관과 객관이란 존재자의 근거가 되는 존재(하이데거)처럼 모든 것의 기원·토대·절대적 근거라고 주장되어 온 모든 것.
▶그는 모든 우상을 공격·파괴하지만 기존의 철학자들처럼 앞선 우상을 대체할 새로운 진리를 내세우지 않는다. 순수한 파괴주의자. 다시 우상으로 전락할 자신의 진리를 제시하지 않으므로 무자비한 비판을 할 수 있으며 자신은 비판받지 않는 유리한 입장 확보.
▶ 기존의 철학적 진리들은 모든 것을 설명하는 완전한 것이 아니며, 그것이 전제하고 있는 숨겨진 것을 드러내면 그것이 은유와 형이상학적 수사임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함. 그는 이를 폭로하기 위해 철학적 텍스트 안에서 그것이 자각하지 못하거나 고의로 억압하고 있는 자기 모순을 폭로해서 그것을 해체시키는 전략을 택함.
▶ 부정과 비판은 어떤 척도에 따라 비판의 대상을 재는 것인데 이 경우 이 척도가 비판되는 것 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전제. 그러므로 이 척도는 스스로를 먼저 정당화해야 하는데, 이러한 정당화 작업 자체가 또 하나의 절대적 근거를 만드는, 즉 모든 것을 비판하면서 자기 자신은 그로부터 벗어나 비판받지 않는 것을 추구하는 형이상학을 건설. 그래서 데리다는 텍스트 바깥에서 그것을 재는 척도를 제시하지 않고 텍스트의 자기 모순을 밝혀서 그것이 부당함을 밝힌다.
2. 시기구분
▶ 데리다의 저작은 {조종}(1974)을 분기점으로 두 시기로 나뉜다.
▶ 전반기의 저작은 하이데거 이후에 대한 모색과 탈구조주의적 구도 속에서 해체론의 방법적 전략과 그 주요 용어들(차연·에크리튀르·흔적·텍스트·의미산종)을 엄밀한 학문적 논증 형식을 통하여 어떤 구체적 주제와 대안으로서 제시. 특히 탈형이상학의 전략이 언어이론에 깊히 관여하면서 차연의 주제와 "텍스트의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명제는 언어철학자들에게 많은 논란.
▶ 후반기 저작에서는 해체론의 선험주의적 요소를 청산하고, 전반기에 이미 선명히 표명된 반-시원회귀적, 비고유성의 사유를 철학 안팎의 경계를 자유롭게 오고가면서 실천. 상세한 인용과 정교한 고증학적 주석, 철학사의 자유로운 재구성, 다의적 언어의 활용과 동음이의어를 통한 창조적 연상, 시적 통찰과 무의미성 등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글쓰기 형식과 문체는 이미 전반기 저작을 통하여 충분히 드러난 바 있다.
3. 데리다 수용의 문제점
▶ {입장들}과 {다른 곶}을 제외한 나머지의 경우 역자들의 이론적, 어학적 소양이 의심스러울 만큼 번역상태가 엉망
▶ 국내의 데리다 연구는 그의 저작들 중 비교적<초기>의 것들에 국한된다는 점.
▶ 데리다 연구에서 국내 소개의 조건이 문제가 되는 것은 데리다나 다른 탈근대적 사상가들이 80년대 말부터 시작된 사회주의권의 위기라는 정세를 배경으로 막스주의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했다는 점 때문→이 때문에 오히려 탈근대적 문제설정의 관여성 자체가 반감되어 한때의 유행이나 이데올로기적 가면으로 치부됨.
4. 해체전략
▶ 그는 서구철학이 비이성에 대한 이성, 차이에 대한 동일성, 不在에 대한 現前을 진리 근거로 주장.
▶ 동일성은 차이와 관계 속에서 차이를 배제함으로써 확보. 동일성 자체는 그곳에 차이에 대한 배제, 억압을 지니고 있는 폭력적인 것. 그래서 그는 이성, 동일성, 현전에 대비되는 비이성, 차이 부재라는 그것의 타자들을 해방시키고자 한다.
▶ 그는 이 작업을 현전의 형이상학을 해체시키는 전략을 통해 완수하려함. 데리다는 서구철학의 근저가 되는 본질/현상의 이원적 대립구조에서 진리-권력의 전략을 탐지. 그것은 본질을 현상에 대한 우선적인 것, 근거로 보고 현상을 본질로부터 파생된 이차적인 것으로 설명함으로써 본질에 특권을 부여하고 그 특권이 그 대립항을 지배하는 것을 정당화한다. 이것은 억압적이고 기만적인 이성에 대한 비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착취·성적 불평등·인종적 차별 등에 대해 투쟁하는 것. <두 항 가운데 하나가 다른 것을(가치론적, 의미론적으로) 명령하거나 다른 것 위에 선다. 이러한 대립을 해체시키는 것은 특정 시점에서 위계질서를 뒤집는 것>. 그런데 데리다는 이 투쟁을 기존 대립관계의 폭로에 무게를 둘 뿐 그것을 실천적으로 폐기하는데 앞장을 서거나 그것을 밑받침하는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여 기존의 동일성, 진리를 보충하는 새로운 억압적 논리를 내세우고 또 다른 동일성을 제시하는 자기 모순에 빠지지 않기 위함.
▶ 따라서 해체전략은 이성, 진리가 나타나 있는 텍스트의 규칙에 복종하는 척하면서 텍스트가 절대적으로 완성되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순간에 그것과 어긋나는 것을 털어놓게 하는 것. 즉 자기가 말하지 않고 텍스트가 스스로 말하게 하면서 그 자기 모순을 드러내어 그것을 논박. 즉 이성이 스스로 모순에 빠지고 자신이 숨긴 '차이'를 털어놓게 하는 전략. 이것은 텍스트를 둘로 쪼개고 한 텍스트 속에 숨어 있는 다른 텍스트를 끌어내어 양자를 어긋나게 하는 것.→어떤 종합도 허용하지 않고, 텍스트의 전략과 전제들을 파멸시키는 작업.
Deconstruction
▶ deconstuction을 번역시 주의할 점(데리다);
1) 단순한 의미의 파괴나 괴멸로 이해하지 말 것. 즉 부정과 거부의 뉘앙스를 담고있는 'de-'를 계보학적 파생 혹은 방향전환을 지칭하는 말로 새 시각를 요구.
2) 분석이나 비판과 동일시하는 것을 경계. 분석이란 더 이상 나누어지지 않는 단순한 요소나 더 이상 소급할 수 없는 기원으로 향하는 것이지만, 데리다의 해체론은 서양의 형이상학을 구성하는 마지막 요소의 순수성과 단순성을 의심하고, 의심할 뿐만 아니라 어떤 부재하는 타자들의 파생물로서 혹은 비현전적 타자에 의해 침범 당해 있는 것으로 증명.
3) 어떤 방법론과도 동일시할 수 없음.; "해체가 아닌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모든 것입니다. 해체인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 해체론을 번역하거나 정의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이유는 그것이 '-이란 무엇인가?'라는 형식의 물음으로 조성되는 사유의 방식(형이상학)을 한계 짓는 작업이기 때문. 따라서 해체론에 대한 정의 혹은 번역은 탈형이상학적 언어유희로 옮아가는 해체론의 실천 속에서만 그 가능성이 주어진다.
▶ 데리다 자체 안에서 해체는 그의 여러 가지 전략적 용어들, 가령 '에크리튀르', '흔적', '차연' '파르마콘' 등등의 말들을 통하여 어떤 대체 가능한 개별적 문맥들로 운반되고 있다.
▶ '해체'를 번역한다는 것은 그 말이 아직 예상하지 않고 있는 해체론적 상황으로 옮겨가는 것이고, 형이상학의 본성과 한계가 동시에 드러나는 또 다른 장소로 그 말을 운반하는 것이다.
▶ 해체론은 형이상학의 불충분성을 입증할 때만 비로소 해체의 권리를 얻을 수 있다.
▶ 데리다에 이르러 형이상학의 본성은 두 가지로 요약
1) 형이상학은 이항 대립적 체계를 본성으로 한다. 이는 형이상학의 내면이 형이하학적인 모든 것(감성적인 것, 외면성, 신체, 물질, 시간적인 것, 개별성과 특수성, 변하는 것, 우연성 등등)과 대립항들로서 구성된다는 것을 말한다.
2) 형이상학은 데리다에게 현전적 존재 이해로서 요약. 로고스중심주의, 음성중심주의, 남근중심주의로서의 형이상학은 존재하는 것의 존재론적 의미를 그것이 시-각theoria 앞에 현재적으로 출석하거나 현상할 수 있는 가능성에 두고 있다. 형이상학의 현전적 존재 이해가 잊고 있는 것은 현전적 존재자를 비로소 현전화시키는 존재이며, 이 존재가 현전적 존재자와 관계할 때 성립하는 존재론적 차이이다.
▶ 해체론은 니체와 하이데거가 제기했던 '형이상학의 극복'이라는 과제를 계승. 이 극복과제는 두 가지 물음으로 요약;
1) 비형이상학적 사유의 가능성, 혹은 탈형이상학적 삶과 문학의 가능성에 대한 물음.→해체론의 긍정적, 미래적 측면.
2) 탈형이상학적 사유에 권리를 부여하기 위한 예비적 물음, 즉 형이상학적 사유의 기원과 본성 그리고 그 지배력의 범위에 대한 물음. 형이상학적 사유의 구속력에 물음을 던지고 그 근거의 정당성을 상대화하는 한에서 해체론은 부정적인 면모를 보인다.
▶ 해체론이 그 본성을 묻는 형이상학은 단순히 과거적인 것이 아니라 현재를 구성하고 있고 이미 지배하고 있는 어떤 것이다. 그 지배의 범위는 언어 전체의 범위에 미치고, 그 변형의 범위는 일상적 언어의 자명성에까지 미친다. 그러므로 해체론이 싸우는 대상은 몸통은 하나이지만 여러 개의 머리를 가지고 있는 히드라와 닮았다. 즉, 해체론의 전통 안에서 형이상학은 과학과 기술 혹은 예술 등과 별개의 영역을 이루는 학문이 아니며, 또 인식론이나 윤리학과 구분되는 협소한 철학 이론도 아니다. 그것은 서양의 문화와 일상에 속하는 모든 것을 근거짓고 일정한 형태와 범위 안에서 재생산하는 일반적 사유체계. 이 사유체계의 지배력이 미치는 범위는 언어의 한계와 겹친다.
▶ 그러므로 형이상학을 비판하기 위해서 그 외면에 선다는 것은 논리적 무의미나 침묵의 입장에 선다는 것과 같고, 이는 형이상학의 자기 방어 기제를 통하여 다시 무력화되어 버린다. 해체론은 형이상학의 언어와 개념적 장치를 빌리면서, 그 기원과 본성 안으로 침잠해가면서, 형이상학의 시대를 한정하고 상대화시킬 수 있는 '바깥'을 모색한다.
▶ 데리다는 해체론을 이중의 글쓰기, 이중회기, 이중의 학문 등으로 불렀다.
1) 해체론이 '이중의 제스처'인 것은 반형이상학적 몸놀림이 친형이상학적 몸놀림과 겹치기 때문.
2) 해체론이 '이중의 글쓰기'인 것은 탈형이상학적 글쓰기로서의 해체론이 동시에 형이상학적 글쓰기를 반복하기 때문
3) 해체론은 형이상학의 시대를 극적으로 연출하고 장면화시킬 수 있는 한에서만 그 시대를 마감시키고 탈형이상학적 시대를 열 수 있다는 점에서 '이중의 회기' 전략이며 '이중의 학문'.
4) 그러나 바로 이중적 절차의 '구조적 불가피성'은 오로지 해체론의 관점에서만 그 필연성을 드러낼 수 있다.
▶ 재구성의 학문으로서의 해체론은 형이상학을 이항 대립적 개념 체계로서, 현전의 존재론이자 고유성에 대한 욕구로서(그 결과 음성중심주의, 남근중심주의, 서양중심주의로서) 재구축한다. 반면 탈구성적 학문으로서의 해체론은 이러한 형이상학적 체계를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불가능하게 하는 이중 회기의 조건에서부터 시작한다. 그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조건으로서 데리다는 차연을 말한다.
Deffarance(차연)
▶ 차연: 차연은 서로 구분되는 것들, 다른 것들을 구분되고 다르게 만드는(간격, 거리, 공간을 만들어 내는) '공간내기'(espacement)와 함께 예정되고 계산된 목적, 결과를 지연시키고, 유보시키는 '시간내기'(temporisation)의 결합작용.
1) 의미작용이 기표와 기의 사이의 결합에 의해 규정된다면, 한 기표의 기의는 다른 '유한개'의 기표들 사이의 차이들의 합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때 이 비교항n의 값이 유한해야만 비교항들의 기의가 모두 확정될 수 있다.
2) 그런데 데리다는 이 체계가 사실상 고정되어 있거나 완결될 수 있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리고 한 기표의 값은 그것이 결정되기 위해 다른 것들과 비교하는 과정이 끝날 때까지 그 의미 확정이 '미루어진다'.
3) 이처럼 데리다는 소쉬르의 주장을 급진화시켜 기표와 기의의 상응 대신에 기표와 기표의 차이운동만을 인정. 한 기표는 자신을 가리키지 않고 다른 기표와의 차이를 가리키며, 다른 기표 역시 또 다른 기표를 가리킬 뿐. 기표는 의미화 작용 '안'에 있고, 기표는 한 기표에서 다른 기표로 운동하고 있을 뿐. 즉 기의는 항상 기표에 의존하며, 기표들의 체계에 의해서만 산출될 수 있다. 따라서 기표와 기의는 다른 기표와의 차이 속에 존재하고 그것이 시간적으로 연기되면서 확정되지 않은 채로 머무르게됨. 데리다는 어떤 기의도 고정된 내용을 갖지 못한다고 주장.
4) 프랑스어에서 차이와 차연을 모두 디페랑스로 발음하기 때문에 양자는 말로서는 구별되지 않고 다만 글쓰기를 통해서만 구별. 차이관계는 말보다 글로써 보다 잘 나타나는 점을 지적. 기표들의 차이관계에서 기표가 지시하는 바는 타자와의 차이이며, 그 자체는 서로 지시하는 다른 기표들의 연쇄운동에 의해 그 의미 내용이 무한히 지연되는 운동--차연(diffe'rance)--가운데 있다.
▶ 차연이란 시공간적 차이가 생산되는 능동적이자 수동적인 운동이며, 부재하는 것들이 현재적인 것을 낳거나 거두어가는 움직임이다. 의미 이해와 기호 교환의 배후인 이 차이의 그물망은 전체적인 것이되 닫혀진 체계가 아니며, 또한 거기에는 고정된 위계나 질서도 없다. 또한 그것은 어떤 사물이나 실체로서 표상할 수 없는 것이다. 개별적 인식과 기호사용을 조건짓고 또 비로소 개방하는 이 차이의 연쇄적 그물망은 현전의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은 무에 가까운 것이며, 다만 그것이 개입하는 개별적 인식과 기호 사용에 흔적으로서 묻어날 뿐이다. 차연은 현재 속에서 배제되거나 부재하는 타자들이 현재의 가능성을 구성하면서 남기는 차이와 지연의 흔적이다.
▶ 형이상학은 이 차연의 흔적을 표상하지 못할 뿐 아니라 사유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무의식과 무능력이야말로 그 자신이 스스로 알지 못하는 형이상학 자체의 기원이자 본성이다.
▶ 데리다의 차연는 현재를 중심으로 이전에 현재했던 과거-현재와 앞으로 현재하게 될 미래-현재의 계기적 연속과정인 선형적 시간화(temporalisation)가 자신의 은폐되고 억압된 근거로서 시간내기를 전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언어학적 인류학적 구조주의)소쉬르와 레비-스트로스)만이 아니라 하이데거의 철학까지도 포함되는 모든 현전(現前, Anwesenheit)의 철학, 로고스 중심주의의 철학을 해체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하나의 동일성이나 그러한 동일성을 갖는 존재자는 단지 다른 존재자와 공간적으로 구분되는 차이일 뿐 아니라 또한 시간적 타자의 결과라는 의미에서 하나의 흔적이며 궁극적 기원 자체는 비기원로서의 원초적 흔적(archi-trace). 이런 의미에서 데리다는 차이가 '기원적 차이'라고 말함.
▶ 한 사물이나 의미의 현전적 자기동일성은 이 차연이 산출하는 무한한 차이의 연쇄 속에서 임시적으로 남겨진 앙금에 불과. 그러므로 차연보다 먼저 오는 실체, 동일성, 현전성은 없다. 차연은 고정된 본성이나 본질이 있는 그 '무엇'이 아니고, 그런 한에서 이름할 수 없는 것. 그러나 이 이름할 수 없는 것이 모든 이름과 개념, 모든 실체적 현전성과 자기 동일성을 낳은 것이며, 낳으면서 거두어 가는 것.
▶ 차연에 이르는 길은 여전히 차이에 있다. 차연은 그것이 끊임없이 낳고 거두어 가는 차이로 지시될 수밖에 없다. 데리다의 차연에 이르기 위해서는 1) 소쉬르의 언어학적 차이, 2)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차이를 통해야 한다.
▶ 소쉬르의 언어학적 차이
1) 기호의 의미는 그것보다 먼저 있는 대상을 지시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 체계 내에서 그것이 다른 모든 기호들과 유지하고 있는 차이와 대조효과에 있다.
2) 소쉬르: "언어에는 차이들밖에 없으며" "언어는 언어학적 체계에 선행하는 개념이나 소리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 체계로부터 유래하는 개념적 차이들과 음성적 차이들만 담고 있다."
3) 개념이든 기호든 모든 것은 차이의 체계가 일으키는 기능적 효과에 불과하다. " 이 원리는 우리에게 다른 실체를--예를 들어 도형적이자 공간적 실체를--배제하면서 어떤 한 실체에--여기서는 음성적이자 시간적 실체에--특권을 부여하지 말 것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모든 의미작용의 과정을 차이들의 형식적 유희로서 간주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을 흔적들의 유희로 이해할 것을 요구한다.
4) 말의 동일성은 차이들의 연쇄적 그물망 안에서 반복적으로 성립하는 임의적 단위에 불과. 이 단어의 체계를 조직하는 차이의 동적 유희 안에서 모든 언어학적 단위는 그 자체로 자족적 실체성이나 자기 지시적 현전성을 소유할 수 없다.
5) 그러므로 모든 언어 기호와 언어적 요소는, 개념적이건 음성적 이건 혹은 형태적이건, 차이와 대조의 연쇄적 그물망을 통해서 그것에 전해지는 언어학적 구조 전체의 흔적에서부터 비로소 구성되고 기능한다.
6) 공간적 운동이자 시간적 운동으로서의 차연이 시작되고 펼쳐지는 범위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의 범위를 넘어서고, 그래서 그것은 표상할 수 없는 것이다. 말의 의미를 배후에서 개방하는 전체로서의 차이의 그물망은 단순하게 현존하거나 단순하게 부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보이지 않는 흔적처럼 각각의 낱말 사용에 삼투하고 있다.
▶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차이'
1) 존재론적 차이란 존재와 존재자 사이에 서로 나누어지면서 이어지는 분간의 '사이'이다.
2) 존재란 현존하는 것의 현전성을 허락하고 개방하고 비로소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지만, 그 스스로는 존재자처럼 존재하지도 않고 표상되지도 않는 배후이다. 본질론적 물음과 인과율적 물음을 초과하는 이 존재의 흔적은 그러나 하나의 사물을 비로소 어떤 현전성 안에 개방하는 사건이자 그 지평(장소)이다. 그러므로 존재는 형이상학이 그것을 잊고 있을 때마저 존재자와 은폐된 관계를 맺고 있다. 형이상학 시대에는 아직 은폐된 채로 남아있는 이 양자의 관계가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론적 차이이다.
3)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차이는, 존재자를 개방하면서 그 뒤로 숨어 버리는 존재가 존재자 안에 남기는 주름이자 흔적. 이 주름과 흔적은 데리다의 자연처럼 시공간적인 '사이'이자 '지연'의 거리이다.
4) 기호의 범람 속에서 실재성이 소멸하고 기표가 더 이상 기의에 근거하거나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기표가 기표의 근거가 되고 기원이 된다는 것, 바로 여기에서 형이상학적 전제 위에 서 있던 고전적 기호개념이 파괴된다.
▶ 텍스트
1) 데리다는 차이의 놀이가 벌어지는 장을 텍스트(texte)로 부름. 이 안에서 기표들은 그 자체의 의미가 아니라 기표들과의 차이, 대립관계를 통해 값이 고정될 수 있다. 이것은 기능하도록 허락하는 초언어적 개방성에 대한 이름, 언어와 기호에 속하는 모든 것은 이 유동적 상태에 있는 텍스트의 세계에 속한다. 따라서 "텍스트의 밖은 없고" "텍스트의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 ; 그가 텍스트라고 부르는 것은 소위 '현실적' '경제적' '역사적' '사회-제도적'이라 불리는 모든 구조들을 뜻하며, 간단히 말해 모든 가능한 준거 대상을 말함. 여기에 "텍스트의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을 상기하자.→그것은 모든 준거 대상과 현실적 실재가 차연적 흔적의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그래서 우리가 어떤 해석의 경험 안에서가 아니라면 이 현실적 실재를 준거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 그러므로 차연이 부정하는 것은 사물의 실재성이나 준거대상의 사실적 존재 가능성이 아니라 해석의 문맥으로부터 사물의 실재성을 추상하거나 고립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다. 그는 텍스트의 의미가 텍스트 안에서 규정될 수 있을 뿐이고 그것이 기표들의 운동에 따른 효과라고 본다. 데리다는 경험적 기표들 전체의 선험적 근거로 상정되는 선험적 기의를 허구라고 본다. 그렇다면 어떤 것도 차이관계의 놀이 '바깥'에서 그 자신의 동일성을 갖지 않는다.
2) 텍스트란 직물조직처럼 이질적인 것들이 얽혀있는 세계의 지도를 그리는 것이기 때문에, 텍스트에서 하나의 원천적인 중심개념이 있을 수 없다.
3) 데리다는 '텍스트성', '상호텍스트성'을 강조. 그는 모든 것이 텍스트 안에 있으며, "텍스트 바깥은 없다"고 선언. 그가 모든 것을 텍스트로 보는 것은 텍스트에서 각 요소들의 상관성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 즉 기호의 체계에서 기호가 차이의 놀이 바깥에 있을 수 없는 것처럼 텍스트에서 각 요소들은 그 요소들의 망 안에서 차이관계에 의해서만 존재.
4) 관념론의 관념성이 순수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경험적 내용이 각인되어 있는 흔적들일 뿐임을 보여준다. 즉 의식이 차이 관계, 제도, 규약, 역사, 실천들의 망에 의해 짜여진 텍스트의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5) 데리다는(괴델의 불완전성 증명에 따라) 일련의 형식적인 논리적 공리가 세계의 진리나 의미, 또는 그 토대를 완전하게 설명할 수 있는 체계를 구성할 수 있다는 가정을 비판.→완전하고 절대적인 지식체계를 상정하면 그것은 완전하기 때문에 그 바깥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만약 잔여가 있다면, 체계와 그 바깥의 것을 한데 묶을 어떤 초월성을 가정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체계와 그 근거를 완결짓는 또 다른 초월성을 상정해야 하고 이 과정은 무한히 이어진다. 그래서 공리체계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데리다는 이러한 결정 불가능성을 보여주기 위해 공리에 의해 결정될 수 없는 주변, 여백(marges)을 공략한다.
6) 텍스트는 의미와무의미, 의미의 ks수와 복수의 그런 재래적인 인식이론적 테두리를 벗어나서 의미자체를 흩어버린다. 이것이 산종(散種disse'mination)
▶ 흔적
1) 데리다는 현전이 흔적에 의해 구성된다고 본다. 흔적이 만드는 차이공간이 있고 그 안에 최초의 현전이 마련된다. 어떤 단순성도 어떤 기원도 흔적에 앞서지 않는다. 오히려 흔적은 현전과 부재를 가능케 하는 장이라 할 수 있다.
2) 흔적은 지워지는 것, 곧 지워짐으로써만 나타난다. 그것은 차이 안에서 간접적으로 나타날뿐 현전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현전을 가능케함.
3) 차이들이 만든 놀이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차이가 다른 것 속에 보존되고 흔적을 지녀야 한다. 이 놀이는 흔적에 의존하지만 각각의 흔적은 다른 흔적에 의해서만 존재하며 최초의 흔적이란 없다. 흔적은 의미 일반의 절대적 기원이다. 바로 이것은 의미 일반의 절대적 기원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 데리다가 플라톤에서 찾아낸 '파르마콘', 루소에게서 찾아낸 '대리적 보충' 등은 차연에 대한 특수한 역사적 사례.
▶ 파르마콘
1) 파르마콘은 데리다의 텍스트 가운데 한 교차점의 명칭. 단 텍스트의 교차지대는 지각작용에 현상으로 노출되지 않는다.
2) 파르마콘은 <약>인 동시에 <독>이며, <축복>인 동시에 <저주>이다.
3) 데리다의 철학에서 파르마콘은 상호이질적인 것들이 서로 차이를 형성하고, 그 차이가 모순 대립으로 가지 않으면서 차이의 차이가 서로 얽히는 텍스트를 만들기 때문에 탁월한 문자학의 세계를 구축하지만, 플라톤은 그런 차이의 차이가 한 개념 안에서 뛰노는 것을 혼동 자체로 보았다. 플라톤의 눈에는 한 몸에 상호 이질적인 것이 잡종으로 섞여 있는 것은 자연적 생명의 유기체적 질서에 대한 도전이었기 때문.
4) 플라톤은 <파르마콘>과 <문자>를 같은 차원의 불청객으로 간주. 그 이유는 ▷ 문자와 파르마콘은 애매모호한 이중성의 얼굴을 갖고 있다. 학문은 참과 거짓, 안과 밖, 선과 악, 본질과 가상, 약과 독 등을 분명히 구분해서 전자의 계열을 취하는 것인데, 문자와 파르마콘은 그런 경계가 없이 뒤섞인 혼돈 그 자체, ▷ 문자와 파르마콘은 영혼의 자발적인 지식의 축적으로서 <기억>을 도와주지 못하고 생기가 빠진 죽은 지식만을 연상시켜 주는 <회상>만을 강화시켜 주어 오히려 인간의 기억력을 감퇴시키고, ▷ 문자와 파르마콘은 인간내면의 생명력과 관계없이 밖에서 들어온 침입자요 불청객이다. 그래서 파르마콘의 정체불명이고 엄밀한 정의가 불가능하고 자리가 분명치 않고, 마치 <조커>처럼 아무 카드에나 접목되어 놀이를 일삼는 유목민의 행태와 비슷하다. 그런점에서 파르마콘이나 문자는 자기 고유성과 정체성이 뚜렷하지 않아서 하나의 <흔적>이나 <그림자>나 <환영>과 같다.
5) 파르마콘의 본질은 고정된 본질이나 고유한 성질을 갖고 있지 않기에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도 하나의 실체(형이상학적, 물리적, 화학적, 연금술적)가 아니라는 데 있다. 파르마콘은 어떤 관념적 동일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비본질적인 것이다.
6) 파르마콘은 兩價的(ambivalent)이다.
7) 상반된 두 가지 사이에 오고 가면서 배드민턴 치기나 배구공을 서로 토싱하듯 차이와 연결의 유희를 하는 것이 <파르마콘>이다. 공이 왔다갔다하는 것은 일방의 행위가 타방에게 연계되고 또 타방이 일방에 연결되기에 가능하다. 이 연계나 연결은 공간적 간격과 시간적 대기가 한 묶음으로 작용하기에 가능하다. 이것이 곧 차연이다. 그런 점에서 파르마콘은 차연의 놀이와 다르지 않다. <파르마콘은 대립된 두가지 항보다 더 나이가 들었다.> 이 파르마콘이 상반된 두 항보다 더 늙었기에, 더 오래되었기에 각 항의 내면성과 순수성을 근원으로 여기고 싶은 모든 고유성의 형이상학, 내면의 형이상학에 큰 타격을 줌.
8) 데리다가 지적한 제3의 장르로서의 그 빈 공간, 그 소굴은 좋은 문자/나쁜 문자, 소기/능기, 선/악, 축복/저주 등의 모든 한쌍의 대립을 가능케하는 하나의 기저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빈 공간은 어떤 고유한 특성도 갖고 있지 않다. 그 공간은 모든 흔적을 다 받아들이는 자궁이요, 허공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그곳을 어머니에 비유. 이 공간을 플라톤은 <코라khora>라고 하였다. 데리다에 의하면 코라는 로고스를 아들로 둔 이데아나 정신적 태양처럼 자기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자기 것이 없기 때문에 코라는 선험적인 관념성에 닮은 그런 소기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코라는 의미도 아니고 개념도 아니다. 그것을 <기저가 없는 기저>라고 표현. 플라톤 주의를 해체시키는 열쇠를 데리다가 플라톤에게서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역설. 그것은 이데아의 아버지와 전혀 다른 코라의 어머니요, 로고스의 말씀과 전혀 다른 파르마콘의 문자.
9) 데리다는 이런 파르마콘을 변별화 일반을 자기 안에서 생기게 하고, 본질과 그 타자와의 대립을 자기 안에서 일어나게 하는 이전의 중용이라고 규명. 선/악, 감성/이성, 영혼/육체, 가시성/비가시성 등의 모든 차이들의 변별보다 더 나이가 먹었다. 그래서 파르마콘 안의 예의 상반된 두 가지가 날실과 씨실처럼 텍스트의 직물짜기를 형성하면서 서로 얽혀가기에 파르마콘은 하나의 상호 얽힘. 즉 파르마콘은 이미 그 자체가 텍스트. 파르마콘은 중심점이 없기에 <대립의 일치>와 같지 않다. 차연은 차이는 가져오나 대립을 잉태하지는 않는다.
10) 파르마콘은 양가성의 선험적 바탕이고 양가적 변별을 가능케하는 <이전의 중용>이기에 논리적으로 그 어느 쪽보다 시간적으로 선행하지 않을 수 없다.
11) 파르마콘의 논리는 동일률, 모순율, 排中律(A는 A이든지 *A이든지 둘중 하나이지 A도 *A도 아닌 제3자일 수는 없다)을 전적으로 무시한다. 형식논리, 로고스의 논리는 위의 동일률과 모순율이 합쳐져서 배중율과 같이 A이든지 *A이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기본에서 성립하고 잇다. 즉 로고스의 논리를 영어로 표현하면 라는 공식으로 설명. 양자택일의 놀이요,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파르마콘>의 논리는 양가성을 다 인정하기 때문에 라는 공식으로 표명. <파르마콘>은 양자택일이 아니고 양가성이나 양자공존 즉 同居의 논리라고 볼 수 있다. 로고스가 택일이나 선택의 논리라면 파르마콘은 동거의 논리이다.
12) 젓가락 운동과 같은 양가성의 논리, 동거의 논리, 차연의 논리, 緣起의 논리는 또한 동시에 그 중심이 없기에 데리다는 그것을 <이전의 중용>, <중립화>라고 함. <중립화>라는 것은 이분법의 어느 측면도 단독으로 긍정하지 않음을 뜻하고 어느 편도 들지 않기에, 둘 다 양면긍정하는 셈이지만, 그 두가지에 또한 얽매이는 것이 아니기에 결국 파르마콘은 이중부정의 논리와 통한다. 양면부정은 파르마콘이 그 중심부가 없는 텅 빈 공간이나 골짜기와 같고 그래서 <파르마콘>은 곧 <코라>와 같은 논리에 속한다. <코라>는 어머니로서 모든 善惡과 生死와 藥毒을 초탈해있다. <코라>는 초탈의 논리. 이렇게 볼 때, 파르마콘이 동시에 코라이기도 하다. 파르마콘은 이중긍정의 논리, 의 논리이면서 동시에 코라의 異名인 한에서 그것은 이중부정의 논리, 의 논리이기도.
13) 텍스트이론으로서의 파르마콘은 어느 일변도 타변에 의하여 문을 닫고 자족하는 자기 동일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세상의 모든 이치가 로고스가 아니고 파르마콘이라면, 결국 이 세상은 모두가 텍스트요,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데리다의 명제가 정당한 셈이다. 모든 것이 텍스트라면 이 세상에 온전한 자기류나 자기성이란 존재할 수가 없고 사람들이 자기 정체성이나 자기성이라고 착각하고 잇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질성과 동거와 접목과 전염에 의하여 가능해진다. 그래서 데리다는 텍스트와 파르마콘이 <종국적으로 뿌리가 없는 나무>라고 비유.
▶ 형이상학의 시대 끝에서 일어나는 기호의 과잉은 기존 언어개념의 테두리를 초과하면서 그 배후의 형이상학적 전제의 무능력을 가시화 시키는데 에크리튀르의 도래를 가져왔다. 이 에크리튀르는 바로 고전적으로 이해된 언어의 바깥이자 형이상학의 바깥이다. 그러나 에크리튀르는 또한 언어의 안이자 언어 자체이며, 그러므로 마찬가지로 차연은 형이상학의 안이자 형이상학 자체다. 형이상학의 시대는 차연이 그 안과 밖을, 그러나 서로 다른 구조로 짜나가면서 형성해놓은 어떤 문양이자 미로이다.
음성중심주의와 글쓰기
1. 글과 기억
▶ 음성중심주의: 말을 입말 혹은 음성 언어위주로 이해하고 반면 문자적 기록이나 글을 파생적이고 대리적 언어로 이해하는 것. 서양인의 표음문자를 우월하게 보는 것도 이에 속한다. 문자가 음성언어를 모방하는 도구적 언어라는 음성중의 언어관은 플라톤 철학이래 계속 등장. 그것은 철학의 현전적 존재 이해와 진리 이해로부터 필연적으로 귀결할 수밖에 없는 사실. 특히 그것은 형이상학이 목소리에 부여한 과도한 특권과 분리할 수 없는 징후.
▶ 음성중심주의는 말과 글을 구분하고 글에 대한 음성, 말에 특권을 부여하는 태도. 데리다는 음성에 특권을 부여하는 형이상학적 전통을 의문시하고 그러한 사고틀이 숨긴 모순을 폭로하고자 함. 이러한 시도는 로고스 중심주의, 이성중심주의에 대한 비판, 해체에 연결된다.
▶ 소크라테스는 진리가 음성/로고스에 온전하게 들어 있어서 말에서 진리가 직접 현전하는데 반해, 글에서는 진리가 직접 대면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그것이 진리의 내용을 훼손시킨다고 봄. 이것을 데리다는 씌어진 기호로부터 독립된 순수한 진리를 주장하는 태도, 곧 자기 현전하는(말해진) 진리의 권위를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
▶ 플라톤은 문자가 기록을 통해 기억을 보완하지만, 그것이 생생한 진리를 기억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죽은 진리만을 전할뿐이라고 본다. 기억(mneme)은 현존하는 말을 통해 생생한 생명을 간직하지만 회상(hypomnesis)은 문자를 통해 생명없는 죽은 내용을 되풀이한다. 이처럼 플라톤은 글이 기억이 아니라 상기시키는 수단일 뿐이며, 진리가 아니라 외형적 지식을 줄뿐이라고 본다.
▶ 데리다는 후설이나 루소같이 음성중심주의를 극단까지 밀고 나가는 언어이론을 통해서 순수한 음성적(시간적) 현전성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 형이상학적 언어이론이 의미의 순수한 현전을 위하여 외면적 요소를 환원한 끝에 남아있는 잔여 속에서, 그 외면적 요소가 오히려 의미의 현전을 위한 필수 불가결한 구성적 요소임을 지적하는 것이 그 증명. 여기서 형이상학의 시대에 속하는 하나의 이론이 어떤 원초적 현전성에 도달하였다고 믿는 순간, 그 현전성 그것이 배제하던 것과의 차연적 관계에 의하여 조건지어져 있음이 밝혀진다. 나아가서 현전의 시간성뿐만 아니라 그것이 반복되는 모든 현재적 순간은 이미 차연적 관계와 흔적을 통해서 조건지어져 있음이 밝혀진다.
▶ 데리다가 형이상학을 음성중심주의로 재구성하는 것은 그의 언어철학과 해체론에서 가장 독창적인 방법적 절차에 해당. 왜냐하면 그러한 절차가 데리다에게 그라마톨로지를 중심으로 해체론적 언어철학을 개성 있는 부피 안에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게 하고, 하이데거를 해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기 때문.
▶ 데리다에 따르면 형이상학의 시대는 언어의 차원에서 두 가지 특징을 필연적으로 노출;
1) 문자언어에 대한 비하와 그 짝을 이루는 음성언어 위주의 언어 이해→음성중심주의
2) 형이상학의 시대는 언어의 언어됨을 책의 관념 속에서 표상하며, 이는 이 책의 관념이 형이상학적 진리 이해에 대한 은유이기 때문. 책을 통하여 비유되는 형이상학적 진리란 총체적 세계를 이루는 진리다. 형이상학의 시대란 책의 시대이고, 이 책의 관념을 통하여 진리의 총체성과 체계성을 보존하고 방어하는 시대이다.
▶ 이런 이항 대립적 개념체계로서 조직되는 형이상학의 시대에 언어는 음성언어 위주로 이해되고 책의 관념 속에서 형이상학적 진리 개념을 보존한다. 이 시대에 개념적 의미는 언어보다 앞선다. 언어는 자기 동일적 의미를 대신하는 기표이다. 그러나 기표로서의 음성은 내면적 의미를 외면화시키자마자 즉각 소멸한다. 내면성은 거기서 비매개적으로 표현되는 것처럼 보인다. 의미한다는 것은 목소리 현상으로서의 말하는 것이고, 이는 자기 자신을 듣는 것이다.
▶ 목소리를 통하여 내면은 비매개적 자기현전과 자기감응을 체험한다. 본래적인 말 혹은 로고스는 말하면서 스스로 듣고, 이를 통하여 자기 현전성 안에 머물러 있는 목소리이다. 이것이 형이상학의 시대에 '존재의 목소리', '양심의 목소리', '신의 음성'과 같은 표현들이 지녔던 강제력의 배후이다.
▶ 이런 음성중심주의 안에서 문자는 음성적 기표를 대신하는 이차적 기표이다. 문자는 음성에 종속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음성이 대신하는 개념적 의미에 종속되어 있다. 문자의 존재 이유는 음성을 담고 개념적 의미를 담는 데 있다. 그러나 정보화 사회에서 목격할 수 있는 언어의 인플레이션 속에서, 이런 음성중심주의 언어관과 그 배후의 형이상학적 전제는 효력을 상실한다. 범람하는 기호들은 대다수가 음성에 대응하지 않으며, 자기 동일적으로 고정된 의미에 종속되어 있지 않다. 많은 기호작용은 목소리 없이, 어떤 개념적 실재와 무관하게 이루어진다. 여기서 기호들은 다만 기표의 기표로서, 기표와 기표의 관계 안에서 기능한다.
▶ 에크리튀르:
데리다는 음성과 초월적 기의로부터 해방된 기표와 문자적 표기들을 에크리튀르(ecriture)라 불렀다. 형이상학적 언어 이해 범위를 이탈하는 이 에크리튀르가 연전히 기호학적 의미 작용 속에 놓이는 것은 바로 거기에 차연이 개입하여 부재하는 타자들의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2. 말과 글
▶ 말/글, 기원/보충, 현전/부재의 대립은 로고스 중심적 이성이 내세우는 이원적 대립구조와 연결.
▶ 진리, 말, 글은 각각 아버지, 착한 아들, 나쁜 아들로 비유됨. 말(logos)은 위대한 주인이며 눈부신 정신적 태양인 아버지의 뜻을 전하는 노릇을 함. 이처럼 말: 로고스의 기원은 그 아버지인 진리. 말은 아버지의 충성스런 아들, 또는 합법적인 자녀지만, 글은 만민의 아버지의 말씀을 대신하는 사생아, 또는 고아. 이는 글이 아버지의 현존 없이 아버지의 말을 기록해서 그 말을 대신할 수 있기 때문. 글은 아버지의 부재를 대체, 보충할 수 있는 위험스러운 것.
3. 독이면서 약인 글
▶ 독당근은 독이면서 약이란 의미: 글은 자기를 낳아준 부모를 죽이는 자. 따라서 글쓰기는 그것이 말과 사고에 대한 위험한 보충, 대체인 점에서 독이다. 글에서는 말이 갖는 직접성이 깨뜨려지고 다른 외적 요소가 개입되므로 의미의 자기현전이 파괴된다. 곧 말은 글에서 자기를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
▶ 글에서 의미는 소외된다. 이런 까닭으로 음성중심주의는 글을 혐오하게 된다. 기호로 새겨진 의미는 저자의 의도에 대해 자율적이고 독립적이다. 그것은 저자의 부재를 대신한다. 이런 기호는 말하는 사람이 부재하는 경우에도 여전히 의미작용을 만들어낸다.
▶ 글을 독당근으로 본다면 글은 자기현전을 제거하는 독이다. 글은 의미를 저자 바깥에 둔다. 그러나 약의 역할도 한다. 의미가 저자의 의도와 똑같이 존속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말에 의해 일시적으로 존재하다가 망각되는 것이 아니라, 글에 의해 반복됨으로써 다시 재생 기억되기 때문이다. 글은 직접적인 자기현전인 말을 소외시키는 '병'인 동시에 표현된 장소와 시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그것을 치유하는 '약'
▶ 현전은 기호란 타자를 이용하고, 기호의 몸을 빌려야 한다.(또는 기호호 보충되어야 한다.) 즉 현전은 기호로 나타나면서 순수한 자기모습을(자기에 낯선) 기호로 변형시켜야 한다.
▶ 데리다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글을 비난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요구하는 이중적 태도를 가진다고 지적. 영원한 진리가 말에 의해서만 존속할 수는 없다. 역설적으로 말을 소외시키는 글에 의해서만 진리의 영원함이 보존될 수 잇다. 말에 의한 현전을 재현시키기 위한 수단인 글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그것은 영혼을 그 바깥에 씌어진 기호로 물질화함으로써 영혼의 자기 대화를 소외시키는 악이다.
▶ 서양 형이상학의 주된 전통은 이런 독당근을 기피하고 원초적 현전을 중시한다. 따라서 철학적 작업은 기원을 보존하려는 것이고, 그러한 현전을 보충, 대체하는 것을 비난한다. 그래서 그것은 기원의 의미를 재파악하고 '반복'하고자 한다. 그렇지만 그런 반복은 기호의 보충, 대체에 의해서만 가능
4 대리적 보충 (위험한 보충; supplement)
▶ 루소는 글을 위험한 보충이라고 봄: 글쓰기는 주체가 말하는 기표를 그 주체 이외의 것에서 차용하는 것으로 대체물이고 보충이다. 이런 글쓰기와 같은 것으로 직접민주주의를 불완전하게 대체하는 대의제란 정치제도나 정상적인 성관계를 대체하여 자연을 속이는 자위를 들 수 있다. 이러한 글은 기호로 현전을 대체하여 현전을 어긋나게하고 지연시킨다.
▶ 보충을 문제 삼을 때 흔히 이미 완전한 전체가 있고 보충되는 것은 그것의 '밖'에 덧붙여진 '잉여물'로 본다. 그런 덧붙임은 그것이 덧붙여지는 완전한 것에 비하여 부차적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거나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런 사소한 것이 왜 필요할까?
▶ 말은 자족적 진리를 지니므로 글은 불필요한 보충이다. 글은 말의 진리내용에 아무것도 더하지 않는다. 그런데 만약 이런 경우라면 보충은 불필요하다. 따라서 보충이 '어떤(중요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말에 어떤 '결핍'이 있어야 할 것이다. 곧 말자체가 완전하지 않으므로 그것을 보충하게 된다. 따라서 보충은 바깥의 덧붙임이 아니라(적어도 보충되는 만큼) 보충되는 것에 필수 불가결한 것이고,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보충은 아무 것도 보충하지 않는 것이면서 동시에 무엇인가를 보충하는 것이기도 하다.
▶ 루소에게 보충은 자연적 결핍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자연의 순결함을 해칠 위협요소가 될 수도 있기에 교육은 위험한 보충이다. 그러나 교육은 필요한 것이기도 함. 데리다는 여기에서 그러한 보충이 불필요한 첨가물이 아니라 사실은 그것이 보충되는 것에 본질적인 것이며, 그것의 결핍을 나타낸다는 점을 지적한다. 데리다는 이런 문제제기를 통해 살아있는 말과 죽은 글을 대립시키고, 목소리로 진리의 현전을 확보한다는 모든 형이상학적 시도를 공격한다. 말/글의 이분법은 형이상학적 이분법(본질/현상, 내용/형식, 동일성/차이, 절대/상대……)과 깊은 관련을 지니며, 그것을 재생산한다. 그리고 말을 통한 진리의 현전은 타자의 매개 없는 순수한 자기 현전이라는 틀을 고수한다.
▶ 형이상학적 진리관: 진리는 기표와 독립해서 그것에 앞서는 기의이다. 진리 안에서 사물 자체는 사고와 일치한다.(지성과 대상의 일치) 진리를 말하는 것(또는 쓰는 것)은 하나의 기술을 사용하여 순수한 자기 현전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처럼 진리를 말할 수 있는 까닭은 기의가 그것을 표현하는 기표 속에 이전되기 전에 이미 그 자체로, 지성적인 것으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 형이상학은 차이들이 아니라 동일성을 바탕으로 삼는다. 동일성의 틀은 차이, 현상, 변화, 혼란을 극복할 수 있다. 진리의 자기 현전도 이런 동일성을 의미한다. 그런데 자기현전, 동일성은 자기 안에 어떠한 차이도 지니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동일성은 차이를 전제하고 차이에 의해서만 생겨나면서도 차이를 모조리 지워버려야만 순수한 자기 자신, 같음, 차이 없음, 어떠한 타자성도 끼여들지 않음으로 존재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동일성은 자신의 출생 기록부를 제거, 은폐한다.
끝에서 울타리로
▶ 울타리
1) 차연이 체계나 구조 혹은 역사적 미로를 조성하는 능력을 '울타리'라는 말을 통해 표기.
2) 하이데거가 사용한 그리스적 의미의 경계peras; 경계는 어떤 것이 가다가 멈추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어떤 것이 그 안에서 생성하는 곳이며, 그 생성된 것이 그 안에 머물러 있을 때, 그 한계는 그것을 이러저러하게 '꼴'짓는 어떤 것이며, 다시 말해서 그것을 어떤 형태 안에 서 있게 하고 그렇게 서 있는 것을 체류하도록 하는 어떤 것이다. 이런 경계짓기를 통하여 해체론은 비로소 탈형이상학적이자 비형이상학적 사유의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모색할 수 있다.
3) 이중회기; 하이데거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존재의 역운이 일으키는 어떤 특정한 시대의 기원이자 종말이다. 데리다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차연이 일으키는 '이중회기'.
4) 해체론이 그리는 경계란 형이상학의 능력과 무능력, 가능성과 불가능성, 이론적 시야와 맹목, 그 기원과 종말을 동시에 가시화시키는 그런 테두리. 파르마콘(독/약), 대리적 보충, 처녀막, 그 밖에 데리다가 형이상학의 시대에 속하면서 이미 그 시대 바깥으로 향하고 있는 것으로 찾아내는 여러 가지 기술적 용어들 전체가 그에 해당.
5) 그의 용어선택과 조어법은 단순한 재치나 대화의 회피 혹은 사적 언어의 유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그 기준은 바로 형이상학의 안과 밖을 동시에 표기하고 서술하는 가능성.
▶ 해체한다는 것은 형이상학과 무관한 것에 입지를 두거나 근거를 두고서 비판과 부정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형이상학의 기원으로 되돌아가면서 형이상학의 본성과 역사를 사유하는 것이며, 그 본성과 역사가 일정한 형태로 보존되기 위해서 배제되거나 억압된 것을 사유하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말에 따르면 해체란 형이상학의 근원에 있으면서 형이상학에게 "감추어져 있는 시작의 법칙을 다시 자유롭게 하는 것"이며, 형이상학의 근원에 대한 "시원적이고 참된 관계"를 회복하는 절차이다.
▶ 형이상학이 출발하는 근원이지만 형이상학의 무능력이 총체적으로 증명되는 결정적 한계점, 바로 그곳이 해체론이 모든 방법적 전략과 노력 끝에 도달하고자 하는 장소. 해체론은 이 장소에서 형이상학의 모든 것을 보고자 한다. 형이상학에 속하고 속하지 않는 것, 형이상학의 역사와 운명, 그것이 생산하는 개념들간의 상호연계성과 통일성, 그 개념들의 체계가 만드는 허점과 그 허점을 통해 드러나는 바깥 등 등을 가장 경제적이고 효율적으로 서술할 수 있는 입지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 데리다는 바로 그런 해체론이 도달하는 마지막 장소를 울타리라고 불렀다.
▶ 형이상학의 완결
1) 철학을 완결한다는 것은 그것을 완전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철학에 주어진 가능성을 최종적으로 실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완결로서의 끝은 어떤 장소를 이루고, 그 장소란 "그 안에서 철학의 역사 전체가 자신의 극단적 가능성의 안에서 회집하는 장소이다. 완결로서의 끝은 이러한 회집을 뜻한다."
2) 철학의 끝은 이 서양적 사유에 기초한 기술문명이 세계의 문명 자체가 되기 시작하는 장소. 그러므로 철학의 종언 혹은 끝이란 시간적 정지나 소멸이 아니라 처음의 가능성이 소진되면서 어떤 장소와 지대를 허락하고, 그 지대 속에서 마지막 변형의 모습을 취하는 것. 그러므로 형이상학은 '극복' 이후에도 소멸하는 것은 아니며 해체이후에도 자취를 감추는 것이 아니다. 다만 변형된 모습으로 다시 돌아올 뿐이며, 그러나 다만 예전의 주도적 지배력을 상실한 채 되돌아올 뿐이다.
▶ 차연이 데리다의 언어철학을 대변하는 중심용어라면, 이 울타리란 말은 니체와 하이데거에서부터 계승되는 '형이상학의 극복'의 과제를 대변하는 용어. 차연처럼 시공간적인 사태를 지칭.울타리를 동사와 명사의 이중적 의미로 새겨야 하는 것은 그것이 차연이 만들어 놓은 것이기 때문. 그러므로 데리다의 차연은 울타리라는 개념과 분리될 때 해체론적 기능을 상실한다. 왜냐하면 차연이 시대와 체계의 구성능력으로부터 추상되기 때문이며, 종언과 극복의 과제로부터 분리되기 때문. 데리다의 해체론은 이런 다의적 의미의 울타리 그리기이다. 여기서 그려지는 울타리는 형이상학의 시작과 끝이 회집하는 장소이며, 동시에 형이상학의 바깥 또는 여백이 형이상학의 안과 맺고 있는 차연적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경계. 데리다가 형이상학의 시대를 꼴 짓는 울타리를 그렸을 때, 그 닫으면서 열리는(구성하면서 파괴하는) 그 경계 안에는 플라톤이래 후설에 이르는 무수한 철학자들이 갇혀 있다. 그러나 그 경계 위에 서 있는 철학자들, 즉 헤겔과 하이데거, 소쉬르가 그들이다. 헤겔의 변증법, 소쉬르의 언어학적 차이와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차이는 그 경계 위에서 차연의 세계로 가는 길목을 이룬다.
▶ 차연이 존재론적 차이보다 더 과격하고 데리다가 그래서 하이데거의 탈형이상학적 사유에 다시 울타리를 그릴 수 있는 것은, 진리에 대하여 고향을 설정하지 않기 때문. 데리다는 언어를 통하여 어떤 '집'(존재의 집)을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집과 고향 또는 모든 울타리와 장소(시대)는 차연이 만드는 임시적 이코스(집)이고 "경제적 축적의 온상(화로, 집, 중심)"이다. 형이상학의 음성위주의 언어관과 책의 관념 속에 보호되는 진리관이 해체되었을 때 드러나는 차연과 '텍스트'의 세계에는 다만 유목적 정착만이 있을 뿐이다.
▶ 현전하는 모든 것, 진리라 불리는 모든 것은 한 곳에 정착하고 거주하자마자 비현전과 비진리로서 이중화되고 분산된다. 또 모든 가능성의 조건은 동시에 불가능성의 조건이 되고, 그래서 모든 구축은 탈구축의 가운데 허락된다. "차연이라는 것, 이 원초적 현전성의 소멸은 '동시에' 진리의 가능성 조건이자 불가능성의 조건"이다. 동시에 바로 이 '동시에'는 자신의 진리 안에, 그 진리의 동일성과 현전성 안에 현재하는 존재자가 스스로 나타나고 현전하자마자 '이중화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유령론
▶ 차이의 작용은 이중경제의 관점에서 고찰되면 제한 경제와 일반경제 사이의 의사초월론적 관계로 나타난다. 제한경제와 일반경제라는 용어는 바따이유의 원래 용어법에서는 각기 1) 생산과 축적, 금욕을 중심으로 한 서양의 전통적인 경제체제(제한 경제)와 2)경제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잉여생산물을 소비하는데 중점을 두는 미개사회의 낭비와 주권적 위신의 경제체제(일반경제)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 데리다는 이를 보다 일반화하여 제한경제를 의미와 현전, 전유/고유화(appropriation)의 체계 일반으로 설정하고, 일반경제를 이러한 제한경제의 은폐되고 배제된 근거, 다시말해 제한경제가 존재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전제해야 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러한 제한 경제의 내부에서 억압되어 그 자체로 현전할 수 없는 이타성의 관계로 체계화한다.
▶ 그러나 일반경제의 타자들은 이렇게 억압되고 배제된다하더라도 그것들이 제한경제의 근거 자체를 구성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제한 경제 내부로 다시 복귀하게 되며, 이 때문에 모든 목적론적 희망에도 불구하고 제한경제는 완성될 수 없고 종결될 수 없다. 따라서 일반경제는 제한경제를(성립)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완결) 불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제한경제의 의사초월론적 근거를 구성한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차이는 모든 현전과 로고스의 체계, 형이상학적인 지배의 체계로서의 제한 경제와 그것의 은폐된 전제를 구성하는 일반경제(흔적, 기록, 대리적 보충, 은유 등과 같은 표지로 표현되는)로 구성된다고 할 수 있다.
▶ 이러한 이중경제의 문제설정에서 본다면 데리다가 말하는 "해체의 일반전략"은 우선 제한 경제의 메커니즘을 해체시키고, 그 안에서 억압되고 배제되어 있는 일반경제의 이타성을 복권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전복) 하지만 이것이 제한경제의 완전한 소멸과 일반경제의 완전한 실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데리다의 말처럼, 일반경제는 "무의미와 죽음, 절대적 손실"의 공간 또는 푸코식으로 말하자면 광기의 공간이며, 이러한 공간의 완전한 실현은 삶 자체, 존재 자체의 순수한 소멸에 다름 아니기 때문.
▶ 순수한 전복적 전략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한 새로운 전략이 필요, 이것이 <긍정적 전위>라고 부르는 것: 이러한 전위의 전략은 우리와 적, 선과 악, 법과 폭력 및 제한 경제와 일반경제를 포함하는 모든 이원적 대립질서 자체에 대한 해체와 전화(轉化, transformation)를 목표로 한다. 타자의 이타성이 정립된다면, 단지 정립되기만 한다면, 이것은 동일자로 귀착되는 역설을 막기 위해서는 타자를 타자로서 동일화하는 매커니즘 자체의 전화가 필요하기 때문. 이런 의미에서 해체의 근본 목표는 입장의 자기 해체, 자기 전화를 통해 해방의 퇴락의 조건들을 제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체의 일반전력은, 적어도 정치문제에서는, 아직 막연하고 추상적으로 남아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 데리다의 체계의 문제설정은 강한 의미에서 철학적이면서 정치적인 것이므로, 서양형이상학에 대한 해체가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는 지배체계의 구조적 폭력에 대한 비판과 연결되어야 하며, 또한 정치적 비판이 근본적이기 위해서는 그 형이상학적 토대에 대한 해체와 전위에까지 이르러야 하는데, 적어도 초기의 작업에서는 이 양자가 긴밀한 상호연관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따라서 {막스의 유령들}( 및 최근의 작업 전체)은 1) 데리다 자신의 초기 문제 설정의 <내재적 교정>과 2) 막스와 유산에 대한 <비판적 상속>이라는 이중적 관점에서 읽혀져야 한다.
▶ 차이가 차이와 음성상으로 구분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존재론과 음성상으로 제대로 구분되지 않는 <유령론>은 차이의 문제설정의 핵심을 계승하면서 이를 정치의 해체를 위한 요소들로 재가공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유령론은 생생한 현재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 계속해서 되돌아오는 유령들을 몰아내고자 하는 존재론의 푸닥거리. 이때 유령은 살아있는 존재는 아니지만 계속 출몰하고 되돌아온다는 의미에서 완전히 소멸해 있는 자도 아니며, (면장갑 속에 가려져 있어) 그 동일성을 확인할 수 없는 "어떤 한 타자로서의 어떤 것/하나"로 남아있다는 의미에서 탁월하게 차이적인 것이다.
▶ 차이의 문제 설정에서는 시간내기의 작용이 생생한 현재의 시간화, 특히 목적론적 시간화를 해체하기 위해서 예정된 목적을 지연시키고 일탈시키는 작용으로 제시되고 있는 데 반해, 유령론에서 시간내기는 근본적으로 (의사-)종말론적인 도래의 약속이라는 의미를 지님.
▶ The time is out of joint; out of joint가 이중적 함의. 1) 원래 진행되어야 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연결고리, 이음매가 빠져 있는 것, 따라서 불의를 의미. 2) 예정된 시간적 진행이 현전의 질서이면서 동시에(정의와 구별되는) 법적 질서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는 <현재>들의 선형적 연속에서 은폐되고 억압되어 있는 시간내기의 "증여 사건"이 드러날 수 있는 기회를 의미하기도 한다. 즉 과거-현재, 현재, 미래-현재로 이어지는 선형적 시간화에서 의사 초월론적 근거를 구성하는 것은 현전하는 것들을 이어주는 이음매로서의 인데, <증여의 사건>은 선형적 시간화에서는 현재들의 연속 속에서 억압되어 있다가 의 순간에서만 드러나는 것이다. 따라서 는 폭력과 일탈을 의미할 수 있는 반면, 그 자체 독점된 폭력과 다름없는 법적 질서의 연속이 해체되고 전위될 수 있는 기회, 즉 "메시아적 정의"가 도래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 이렇게 가 한편에서는 불의와 폭력, 다른 한편에서는 정의라는 두가지 가능성의 동시적 개방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러한 가능성들의 선별이라는 문제가 제기. 데리다는 이 문제가 전적으로 우리가 타자에 대한 책임을 떠맡을 수 있는가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데리다의 관점은 "타자와의 관계가 곧 정의이다"라는 레비나스의 함축적인 테제에서 유래한다. 타자와의 "무한한 비대칭성"속에서 자신의 입장을 "탈-정립"하면서 타자에게 스스로를 절대적으로 개방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타자와의 관계, 또는 타자에 대한 책임을 떠맡는다는 것은 또한 자기의 동일성을 해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데리다의 타자에 대한 책임, 환대(hospitalite)는 윤리적 요청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정치적 관점과도 긴밀한 연관. 지금-여기 도래하고 도래해야 하는 "(해방의) 약속의 형식적 구조...해방의 약 속의 특정한 경험"을 의미하며, 타자의 도래라는 정의의 사건에 대해 책임을 지고 환대할 것을 요구하는 실천적 명령을 함축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타자의 도래는 차이의 조건 자체. "이타성 없이는 차이도 없고, 단독성 없이는 이타성도 없으며, 지금-여기 없이는 단독성도 없다.
▶ 유령론의 탈해방적 정치는 이러한 해방의 정치의 역설, 즉 해방운동 자체가 또 하나의 폭력과 지배로 전도되는 역설의 경험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출발한다. 하지만 데리다에게서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는 폭력과 저항의 관계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인 경계, 비대칭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절대적인 악, "원초적 폭력"은 유한자로서의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동일성과 고유성, 자기보존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에서, 따라서 타자의 배제와 억압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리하여 데리다가 볼 때 유령과 현실을 구분하려는 막스의 시도는 오히려 순수한 동일성에 대한 집착을 보여주는 것이며, 자신의 유한성, 자신의 폭력성을 혁명의 목적론, 즉 지양의 목적론을 통해 삭제하려는 원초적 폭력의 간지(奸智)를 보여 주는 것이다.
▶ 따라서 데리다는 <현재>처럼 폭력적인 세계화의 질서 속에서 해방의 정치와 막스의 유산을 상속하고 보존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의무라고 말하지만, 또한 이러한 상속은 항상 비판적 선별을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유령들은 항상 "하나 이상이자 더 이상 하나가 아니"며 우리가 유산을 기억하고 보존해야하는 막스라는 유령이 존재한다면 또한 막스가 몰아내려고 했던 막스 자신의 유령도 존재하기 때문.
▶ {막스의 유령들}에서 이러한 선별적 상속의 과제는 데리다가 "새로운 인터내셔널"이라고 부르는 정치적 교통, 또는 차지들 사이의 개방적 관계 설정의 과제로 집약. 이러한 과제는 한편으로 구조적인 착취와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대항폭력의 조직이 불가피하다는 요구와, 다른 한편으로 근대적 해방운동의 역설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이러한 폭력은 스스로를 해체하는 폭력이어야 한다는 요구 모두를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 하지만 이러한 인터내셔널, 즉 "신분과 직위, 호칭 없이, 은밀하지 않지만 거의 공적인 것도 아니며, 계약을 맺지 않고, 조정 없이, 당과 조국, 민족공동체... 공동체 시민성 없이, 어떤 계급으로의 공동적 소속 없이 이루어지는 비동시적인 연대"는 폭력적인 세계화의 전개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 수단중 하나이며, 새로운 해방의 정치의 불가결한 목표 중 하나라는 점.
미국에서의 데리다 수용
▶ 데리다는 예일학파(폴 드 만, 불룸 등)을 통해서 또 이들과 더불어 미국에 소개. 해체론은 문학비평가들과 문학독자의 범위를 벗어나 언어철학자 혹은 분석철학자들에 의해 수용. 수용이라기 보다는 논쟁과 비판. 그밖에는 로티의 경우에서처럼, 해체론은 미국적 실용주의의 전통 안에서 수정. 그러나 최근에 해체론을 타자에 대한 배려에 기초한 탈관념론적 윤리학으로서, 혹은 텍스트에 기반한 어떤 실천적 행위로서 해석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평가
▶ 데리다는 열림과 자유를 추구한다. 그는 획일화, 동질화, 균등한 문화와 상업적 질서에 반대하면서 그것에 어떠한 대안적 체계도 세우지 않은 채 맞서고자 한다.
▶ 그는 열린 공동체를 추구. 이것은 폐쇄되지 않고 성원 각자의 자유에 맡겨진 공간으로서, 조화로운 전체나 합의에 매달리지 않고 불일치나 갈등을 넘어서는 근본적 일치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과 타자 사이에 어떠한 공통의 척도, 메타언어, 초월적 기준이 있다고 보지 않음.
▶ 예일학파를 중심으로 미국에서 해체주의 비평운동으로 전개: 철학이 수사법에 지나지 않으면서도 스스로의 계보를 숨김으로써 특권적 진리를 가정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 철학을 탈신비화한다. 이들은 데리다의 해체를 텍스트의 '자유로운 놀이'에 대한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들은 기표를 선험적 기의에 대한 의무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한다. 그래서 텍스트는 독립성을 가지며, 고정된 의미의 속박이 없으며, 텍스트 자체가 자신의 생명을 갖고 가능한 의미의 무한한 계열을 자유롭게 만들어 낸다고 본다. 이것은 고정된 해석과 텍스트 근저에 있는 불변적 의미를 추구하는 '랍비'적 독해보다는 어떠한 의미의 폐쇄도 없는 조이스적 독해를 추구.
▶ {마르크스와 유령들}: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맹목적으로 질주하는 자본주의의 신질서에 대항하고, 착취와 고통에 시달리는 현상황에 맞서기 위한 연대이다. 그는 우리가 마르크스의 상속자라기보다는 우리의 유산에서 마르크스를 제거할 수 없으며, 마르크스와 그의 유산이 없이는 미래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마르크스의 상품의 물신성이란 개념을 상품의 교환가치라는 '감각적이고 초감각적인'유령이 벌이는 요술로 재해석. 그는 오늘날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자본주의 시장의 무자비한 폭력을 옹호하는 큰 이야기와 대결할 수 있는 교조화되지 않은 '마르크스의 정신들'을 환기시킨다. 그는 역사상 인간들이 이토록 폭력, 불평등, 배제, 기아,. 경제적 탄압에 시달린 적이 없다고 본다. 그는 이에 맞서기 위한 연대를 제안하는데, 그것은 특이하게도 어떠한 조직도, 당도, 교리도, 이데올로기도 없는 인터내셔널을 말한다. 이것은 텔레-테크놀러지에 의해 마련된 새로운 공적 영역, 여론의 공간을 배경으로 삼는 커뮤니케이션의 변화와 관련된다.
▶ 데리다 해체의 문제점:
1) 해체는 철학적 텍스트, 특히 철학적 이성을 해체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기존제도, 체제에 대한 합리적 저항의 가능성을 매몰시킬 위험이 있다.
2) 해체는 텍스트의 의미와 진리의 효과를 낳지만 동시에 그것을 자기모순과 함께 파묻는 메커니즘을 드러내는 일. 그렇지만 정치적 적대관계가 논리적 모순으로 환원될 수는 없다.
3) 형이상학의 종말은 이데올로기의 종말과 마찬가지로 이데올로기는 아닌가?
4) 철학을 존재가 아닌 존재자, 사회-역사적인 공동체, 현실에 대한 질문과 모색으로 본다면 철학의 종말과 형이상학의 해체는 카스토리아디스의 지적처럼 종말에 대해, 철학이 바람직한 공동체에 대한 질문과 추구라는 점에서 지금도 그것이 여전히 유효한 것이고 우리의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추구가 끊이지 않는 한 철학이란 나무는 시들지 않는다고 볼 수는 없는가?
■ 참고문헌
김형효, 데리다의 해체철학, (민음사, 1996)
김상환, 해체론시대의 철학, (문학과 지성사, 1996)
양운덕 외, 현대철학의 흐름, (동녘, 1996)
The panes of glass are warm to the touch, so the heat of our hands leaves little trace of our fingers. Like warm moist air breathed onto a window pane, momentarily erasing the world, the condensation makes the transparent surface visible.
Monday, November 13, 2006
Elanine Scarry, The objectification of Prisoner's World Dissoultion
the room, the simplest form of shelter, expresses the most benign potential of human life. It is , on the one hand, an enlargement of the body: it keeps warm and safe the individual it houses in the same way the body encloses and protects the individual within; like the body its walls put boundaries around the self preventing undifferentiated contact with the world yet in its windows and doors, crude versions of the senses, it enables the self to move into that world and allows that world to enter.
Monday, November 06, 2006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 존재
인간은 정신적으로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그에게 죽음의 공포가 적어진다.
나아가 오로지 정신적인 삶을 산다면
죽음은 전혀 두렵지 않게 된다.
그러한 인간에게 죽음은
육체로부터의 정신의 해방에 불과하다.
그는 자신의 삶의 근거가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가 죽은 뒤에 어덯게 될 것인지,
태어나기 전에는 어땠는지 하는 것을 모르는 것은,
그런것은 특별히 알 필요가 없기 때문에 알려져 있지 않는 것이다.
오직 한가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우리의 생명은 육체의 변화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에 깃들어 있는 것 속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 육체 속에 살고 있는 것은 정신적인 존재이며,
그 정신적 존재에게는 본디 시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 것이다
-톨스토이-
Wednesday, November 01, 2006
A buddy from my old stomping grounds.
죽마고우(竹馬故友).
A friend in need is a friend indeed.
곤궁할 때의 친구가 정말 친구다.
All are not friends that speak us fair.
모두가 우리들에게 공정하게 말하는 친구들은 아니다.
A man cannot be said to succeed in this life who does not satisfy one friend.
친구 하나도 만족시켜 주지 못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성공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A man is known by the company he keeps.
사람은 그가 사귀고 있는 친구에 의해 알 수 있다.
A man must eat a peck of salt with his friend before he knows him.
사람은 친구와 한 숟갈의 소금을 나누어 먹었을 때 비로소 그 친구를 알 수 있다.
Birds of a feather flock together.
같은 깃털의 새들은 함께 모인다.
Company in distress makes distress less.
힘들 때의 친구는 고난을 덜어준다.
Friends and wines improve with age.
친구와 포도주는 오래될수록 나아진다.
Friendship is a single soul dwelling in two bodies.
우정은 돈과 같아서 버는 것보다 간직하는 것이 더 어렵다.
Friendship is the marriage of the soul, and this marriage is liable to divorce.
우정은 영혼의 결혼인데, 이 결혼은 이혼하기 쉽다.
Friendships ought to be immortal, hostilities moral.
우정은 불멸의 것이어야 하고 적대감은 일시적인 것이어야 한다.
Friendship that flames goes out in a flash.
불길처럼 불타오른 우정은 쉽게 꺼져 버리는 법이다.
He that lives with cripples learns to limp.
절름발이와 사는 사람은 절뚝거림을 배운다.
I can not be your friend and your flatterer too.
나는 당신의 친구이고 또한 당신의 아첨꾼일 수는 없다.
It is as foolish to make experiments upon the constancy of a friend, as upon the chastity of a wife.
친구의 우정을 시험하는 것은 부인의 정절을 시험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어리석음이다.
It is more ignominious to mistrust our friends than to be deceived by them.
친구에게 속는 것보다 그를 못 믿는 것이 더 수치스럽다.
It is more shameful to mistrust to mistrust one's friends than to be deceived by them.
친구에게 배반당하는 것보다 친구를 불신하는 것이 훨씬 더 부끄러운 일이다.
Let beggars match with beggars.
유유상종(類類相從).
Like draws to/attracts like.
같은 것은 같은 것을 이끈다.
Men are known by the company they keep.
친구를 보면 친구를 안다.
Man should keep his friendship in constant repair.
사람은 끊임없이 수리하면서 그의 우정을 지켜야 한다.
No man can be happy without a friend, nor be sure of his friend till he is unhappy.
친구가 없는 사람은 행복할 수 없다. 또한 자신이 불행한 처지에 빠지기 전까지는 친구의 진가를 확실히 알 수 없는 것이다.
One friend in a lifetime is much; two are many; three are hardly possible.
사람은 평생에 한 친구면 충분하다. 둘은 많고 셋은 문제가 생긴다.
Prosperity makes friends, adversity tries them.
성공은 친구를 만들고, 역경은 친구를 시험한다.
Real friendship is shown in times of trouble, / prosperity is full of friends.
진정한 우정은 곤경에 처했을 때 나타난다. 형편이 좋을 때는 별별 친구들이 다 몰려오기 때문이다.
There are three faithful friends-an ld wife, an old dog, and ready money.
충성스런 친구가 셋이 있다. -늙은 아내, 늙은 개, 그리고 현금.
Those that lack friends to open themselves unto are cannibals of their own hearts.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 놓을 수 있는 친구가 없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짓밟아 뭉개는 야수가 된다.
To be capable of steady friendship or lasting love, are the two greatest proofs, not only of goodness of heart, but of strength of mind.
단단한 우정, 또는 영속적인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면, 그것은 마음이 선량할 뿐만 아니라 굳건한 정신력을 가진 그야말로 인간으로서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조건을 겸비하였다는 좋은 증거다.
To like and dislike the same things, this is what makes a solid friendship.
같은 것을 같이 좋아하고 같이 싫어하는 것은 우정의 끈을 더욱 단단하게 옭아준다.
True friendship is like sound health, the value of it is seldom known until it be lost.
참된 우정은 건강과 같다. 즉, 그것을 잃기 전까지는 우정의 참된 가치를 절대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Two peas in the same pod!
꼬투리 속의 두 개의 완두콩. 정말 친한 친구 두 사람을 가르켜 하는말.
Wishing to be is quick work, but friendship is a slow ripening fruit.
친구가 되려는 마음을 갖는 것은 간단하지만 우정을 이루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Friday, October 27, 2006
regarding spirituality
The realm of the spiritual is mysterious and inviting. It is a place where we are encouraged to explore the unknown; to search, ponder, and reflect. It is a place where we can gain a greater knowledge of self and sometimes, sometimes, even find illumination.
There is no definitive map or designated entrance to this state of mind- we are each on our own when it comes to accessing the spiritual. ->unexpected place
Agnes Martin and Mark Rothko
AM-creating a body of deceptively simple minimalist paintings that speak worlds to those who choose to take an extended look and open themselves up to them.
Her paintings manifest a meditative effort on the part of the artist and invite viewers to respond in kind. With a relative modicum of line and color, and everpresent traces of the hyman hand, Martin's paintings invite quiet contemplation. Rigid through they may seem, their perfection lies in their imperfection; as in nature, ther are no perfectly straight lines in a Martin painting.
"The great and fatal pitfall in the art field and in life is dependence on the intellect rather than inspiration."
She writes of perfection and of ideals; about truth, beauty, and the sublime; and of being open to self-discovery and fully aware of everything around you, both large and samll.
Happiness is the result of being fully open and receptive to what life offers us, or in her own words:"Happiness is being on the beam with life - to feel the pull of life."
MR sought the sublime in a form of purity through a fundamental use of color, line, and shape.
James Turrell, Ann Hamiton, John Feodorv, Shahzia Sikander, and Berly Korot
JT's particular gift is in allowing us to have a unique and intimate experience with light and to feel its transcendent power.
Hamilton's and Turrell's works take us into the realm of the spiritual by engaging the sensorium, by making us hyperaware of that which is around us.
Art has that rare ability ro make us pause, reflect, and explore our innermost being. It is a key that can unlock countless doors, opening our eyes, our minds, and our hearts. As Thomas Merton, one of the twentieth century's great theologians, has written:
In art we find ourselves and lose ourselves at the same time.
from A Thomas Merton reader (1974)
Ernesto Neto
지젝
http://www.calitosway.net/3645
http://72.14.205.104/search?q=cache:1xh7aoiaXS0J:www.calitosway.net/tag/대상소문자%2520a+슬라보예+지젝&hl=en&gl=us&ct=clnk&cd=23&client=safari
(1) 주체란 무엇이며 왜 중요한가?
지젝에게 코기토는 자연의 모든 것들이 부정된 이후의 텅 빈 장소, 즉 공백이다. 주체는 자연에서 문화로 이행할 때 "사라지는 매개자"로 기능하는 것이다. 우리는 실재로부터 상징계로 진입하면서 주체를 잃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주체는 언제나 그 상실을 회복하고자 하지만, 오히려 주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토대를 외재화시킨채로 둘 수밖에 없다(ex-timacy). 이렇게 상징계에 종속되는 과정이 곧 주체화과정이다. 그러나 여기에 저항할 수는 없는가? 지젝에 따르면 사람들은 상징계의 요소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엮어내는 서사적 능력을 갖고 있어서, 주체는 변하지 않는 공백으로 남지만 "자기(self)"는 반복하여 갱신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미 우리의 "자리"가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이것이 저항적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주체에 대한 강력한 이론화와는 달리, 대안에 대한 지젝의 이론화는 늘 빈약한 느낌을 준다. 기껏해야 "의미화실천"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 의심스럽다.
(2) 포스트모던의 끔찍한 탈근대성
국내에 "성찰적 근대화론자"로 알려진 기든스, 벡, 래쉬/어리 등은 후기 근대를 "위험사회"로 명명하면서도 동시에 자아의 성찰성/재귀성(reflexivity)이 갖고 있는 긍정적 가능성에 주목하였다. 물론 그것이 "폭주하는 자동차"와 같은 불안한 것임을 경고하였지만, 환경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재귀적 자아가 갖고 있는 잠재력은 생산적 희망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젝은 재귀성의 의미를 완전히 뒤집어버린다. 대타자의 권위가 사라져버린 상황에서 사람들은 재귀적으로 "사적인 법(지배종속관계, 새도매저키즘)"에 얽매이게 된다는 것이다. 귀환한 초자아는 쾌락을 명령하고 사람들은 오히려 스스로를 규제하게 된다. 이와 같은 지젝의 논증은 실제 사례에 적용하기도 어렵지 않고, 경우에 따라서는 매우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그간의 성찰적 근대화론을 자신있게 끌어와 반박할 정도로 이론적으로 엄밀한 것은 아니다. 하나의 반례 정도로 생각하면 충분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다른 방식으로 통제를 원하는 "경향"이 있고 그것이 현대 사회의 "징후"라는 것은 전적으로 납득가능하다. 이와 같은 현대인의 딜레마를 해소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지젝은 놀랍게도 아예 이런 조건 자체를 없애는 것을 제시한다. 상징적 질서를 거부하고 혁명을 일으키자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방향으로?! 내게는 이것이 히스테리컬한 비약으로만 느껴질 뿐이다. 후기 근대적 자아가 갖고 있는 재귀성을 무력화시킨 이후에도 사회혁명이 가능한가?!
(3) 이데올로기에서 현실을 구분해내는 법
내게 가장 익숙한 논의이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지젝의 주장들 중 하나를 다룬 챕터이다. 슬로터다익이 제안한 공식, "그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을 잘 알지만, 여전히 그렇게 행동한다"는 명제는 냉소적 주체의 등장을 알린다. 지젝은 그의 논의를 받아들인다. 즉 이데올로기는 앎의 문제가 아니라 행함의 문제이다. 따라서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는 오히려 이데올로기 기계로서, 의식보다 행위로 먼저 이루어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알면서도 그대로 행동하는 인형같은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사실 냉소하지 않으려는 결단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지젝은 오늘날에도 이데올로기 비판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토대로서 냉소적 주체론을 활용했을지 모르지만, 사실 정치적으로 무감각한 사람들을 마주하고 있는 나로서는 냉소적 주체를 극복하는 것은 매우 절실한 문제다. 냉소적 주체가 확신하고 있는 것과 달리, "세계는 이항대립이 아니라 삼원체계이고 여기서 이데올로기는 상징계와 실재 사이의 유령같은 보충물과 같은 것으로 기능한다"는 것을, 그들이 간파하게 되면 상황이 달라질까?! 결국 지젝은 실재를 직시하고 구분해내라는 말을 하고 싶어하는 것이라는 점을 잘 안다. 그러나 실재에 접근하기 위한 보다 즉물적인 방법으로 우리는 "냉소적 주체"를 대체할 새로운 주체의 모습을 창안할 수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이입"이라든가. 예전에 수업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어쨌든 삼원체계 모델은 많은 통찰을 주는 것이어서 여러가지 복잡한 생각을 하게 만든다. 최근 나는 "몸"을 이론화하는 방식을 고민하고 있다.)
(4) 같은 행성에서 온 남성과 여성, 그 사랑의 이데올로기
"성 관계는 없다", "여자는 남자의 증상이다"와 같은 센세이셔널한 명제를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지젝의 사상들 중에서 가장 불만족스러운 부분이다. 지젝 특유의 독창성이나 흥미로움이 다소 반감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페미니스트들에게는 특히 비판적으로 접근되었던 논의인데, 사실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정신분석학이 효과적으로 반박되었던 적은 거의 없으며 이 책에 소개된 주디스 버틀러의 반론도 다소 부적절하게 느껴진다. 정신분석학에 대한 메타비판보다는 차라리 (지젝처럼) "창조적 오독"을 통해 그것을 페미니즘에 생산적인 방식으로 전유하는 것이 더 낫다. 사실 성적 차이는 실재적인 것이어서 상징화가 불가능하며, 결국 이 둘의 관계는 실패한다는 지젝(그리고 라캉)의 논의를 거부하기는 어렵다. 15년쯤 전에 필리프 쥘리앵은 사랑은 "두 개의 오해가 서로 겹치는 것", 즉 실패한 행위라고 썼다. 이 때 쥘리앵은 실패는 곧 성공이라는 윤리학적 입장을 취하는 반면, 지젝은 사랑은 성 관계의 불가능성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라는 입장을 취하는 듯 싶다. 내게는 두 가지 입장이 모두 불충분하게 느껴지고, 라캉에 기반하면서도 좀더 정교한 제3의 태도가 가능하다고 보고 있는데 아직 답을 내린 것은 아니다.
(5) 인종주의는 왜 항상 환상인가?
이 챕터는 지금까지 살펴본 지젝의 이론으로 인종주의를 분석하고 있으며, (1) (2) (3)과 밀접하게 얽혀있는 부분이다. 인종주의는 진정 환상이다. 인종적 타자는 우리의 향락을 훔치려고 하거나, 아니면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향락을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에 대한 상식이 증가하고, 다문화주의가 힘을 얻고, 인권과 평등에 대한 도덕적 가치가 확산되더라도 인종주의는 여전히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현대인들은 자신의 인종차별적 행위를 다양한 지식을 동원하여 정당화하기까지 한다. 이와 같은 태도는 논리적 설득으로 타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완벽하게 자기충족적인 설명 속에서 우리는 무슨 대안을 찾을 수 있는가?! 지젝은 고육책으로 세 가지 방안을 제시하는데 솔직히 이것은 대안이라기보다는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로 다가온다. 첫째, 환상의 윤리학. 둘째, 시민사회보다는 정부를 지지할 것. 셋째, 환상을 가로지르기. 첫번째는 너무 절충주의적이고 봉합적인 것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세번째 방법과 양립할 수 있는지조차 모르겠다. 두번째 주장은 민족주의라는 아킬레스건을 갖고 있는 사회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대안이라는 점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선택할 수 있는 사안들은 한정되어 있다. 인종주의는 디아스포라 시대에 더더욱 면밀하게 다루어져야 할 것으로, 이보다는 훨씬 더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일상의 대안들이 필요하다고 본다.
Ann Hamilton has a background in textiles and weaving. She describes the drawn linde and the thread, weaving, the computational structure of video, and non-narrative works. Writing about her video work from the 1970s-I becoame interested in the handloom as the first computer on earth, as the original grid and as a key to visual structuring....To realize that the structure of woven cloth provided a firm basis for the ordering of video information and time in the creation of precedent at a time when the limitlessness and newness of this medium were being extolled. In an age of such tremendous multiplicity of viewpoints, traditions, and beliefs as our own, it was a physical way for me as an artist, in an effort to heal my own inner striving for peace, to stretch my arms across millemmia to join the ancient and the new in one long embrace."
I don't know that I can articulate that realtionship between the thread and the written line and the drawn line, but for me...it's about the origin of things, about a really fundamental act of making."
time-consuming collaborative work-labor intensive acts of art-making, honored Midwestern work ethic-that labor is its own redemption
making of art is a social act, and that "how one chooses to be social is an ethical act"
Richard Serra-"I think that what artists do is they invent strategies that allow themselves to see in a way that they haven't seen before-to extend their vision."
Process art which emphasized the process of creation.
Laurie Anderson- future-inspired sense of time and spaces as infinite and elastic, and of the world as on eminor portion of a never-ending universe.
space-region of the mind
Place is latitudinal and lognitudinal within the map of a person's life. It is temporal and spatial, personal and political. A layered location replete with human histories and memories, place has width as well as depth. It is about connections, what surrounds it, what formed it, what happened there, what will happen there.- Lucy Lippard, The lecture of the local(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