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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November 14, 2006

장자의 사유체계에 드러난 동북아 예술의 미학 - 이정우

사물들이 나타난다는 것, 그들을 볼 수 있고 그들에 대해 사유할 수 있다는 것, 본 것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이자 행복이다. 존재의 빛 속에서 출렁이는 사물들은 예술가의 영감을 통해 물감 속에서, 돌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철학자들은 존재를 사유한다. 미술과 철학의 교차로들에서 존재, 그리고 존재가 내뿜는 빛이 사유와 문화의 차원으로 번역된다. 존재의 빛은 마음속에 접히고 그 주름은 다시 문화로 펼쳐진다. 이제 이런 담론사적 사건들이 발생했던 교차로들을 더듬어보자.


사진/ 난초를 그린 <사군자>.

중국을 비롯한 동북아의 예술을 특징짓는 것들 중 하나로 사물의 세세한 점들을 솎아내고 그 구조만을, 더 나아가 그 구조까지도 솎아내고 그 힘(=力能)만을 표현해내는 점을 들 수 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달마 그림이나 커다란 붓으로 단번에 휘갈겨 쓴 글씨, 몇번의 붓질만으로 그린 난초 그림 등은 다른 예술 전통에서 쉽게 찾아보기 힘든 독특함을 지니고 있다. 이런 특징들은 어떤 사유로부터 솟아오르는가? 우리는 장자(莊子)에게서 동북아 예술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공통된 미학의 실마리를 읽어낼 수 있다.

“기술에서 시작해 도로 나아간다”

<장자>, ‘양생주’에 등장하는 포정이 소 잡는 이야기는 미학적 맥락에서 읽을 때 또다른 맛을 만끽할 수 있다. 유명한 요리사인 포정이 양나라의 문혜군을 위해서 소를 잡은 적이 있다. 손으로 꽉 잡고, 어깨로 받치고, 발을 굳게 디디고, 무릎을 구부리면서 놀라운 솜씨로 소를 잡았는데, 그때 나는 소리가 상림지무(桑林之舞)와 경수지회(經首之會)에 들어맞았다 한다(상림지무와 경수지회는 옛 음악을 말함). 양혜군이 그 모습을 보고 놀라 기술이 어떻게 그런 경지에까지 도달할 수 있는가 하고 물었다. 그때 포정은 이후 동북아 미학사상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대답을 내어놓는다. “제가 추구하는 것은 도(道)입니다. 기술에서 시작해 도로 나아가는 것이죠.”

기술에서 도로 나아간다는 것은 형이하에서 형이상으로, 물체를 다루는 손에서 마음으로 나아감을 뜻한다. 그 과정을 포정은 이렇게 말한다. “제가 처음으로 소를 잡았을 때는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분간이 가지 않았습니다. 3년이 지나자 비로소 소 전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제는 소를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느낍니다. 감각기관으로 파악하기를 그치고 온몸이 흘러가는 대로 맡기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온몸’으로 번역한 ‘신’(神)은 마음까지 포함한다. <내경>에서 신은 기(氣)를 통어(通御)한다고 했거니와, 온몸의 기가 신에 의해 통어됨으로써 신체 각 부분의 기능적 활동을 넘어 온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경지를 가리키고 있다. 이것이 곧 기술을 넘어 도로 나아간 경지이다.

감각을 통한 지각과 신체적 훈련, 물체에 대한 경험이 오랫동안 성숙하면 급기야는 정신적 차원으로 상승하게 되고(여기에서 ‘정신’이란 본래의 한의학적-기학적 의미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물(物)과 심(心)의 경계가 없어져 혼연일체의 상태가 된다. 그때 사물에 대한 꼼꼼한 관찰이나 계산, 분석 등을 넘어 몰아(沒我)의 경지에서 사물을 대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경지에로의 상승은 또한 기술의 초월뿐만 아니라 사심(私心 또는 邪心)의 초월도 요구한다. 즉, 몸이 점차 대상과 합일해가는 과정 못지않게 마음의 때를 씻고 사물을 순수하게 볼 것을 요구한다. ‘달생’(達生)에 등장하는 재경의 이야기는 이 점을 말하고 있다.

목공예의 명장인 재경이 그 놀라운 재능의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악기를 만들기 전에 먼저 기를 모읍니다. 그리고 반드시 몸을 깨끗이 해 마음을 맑게 합니다. 사흘을 재계(齋戒)하면 상이나 벼슬에 대한 욕망이 사라지고, 닷새를 재계하면 명예를 좇고 비난을 피하려는 마음이 사라지고, 이레를 재계하면 제 몸까지도 놓아버리는 경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재경은 이런 경지가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작업을 시작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곧 ‘마음을 씻는 것’(心齋)을 말한다. 몸이 감각기관들의 부분적 기능을 넘어 사물과 합체하고, 마음이 모든 때를 씻어내어 순수를 찾을 때 위대한 예술가가 탄생하는 것이다.

텅 비움을 얻으려면 마음을 씻어라

사진/ <달마도>

‘인간세’(人間世)에서는 안회와 공자의 대화라는 형식을 빌려 심재가 설명된다. 안회가 심재에 대해 묻자, 공자는 이렇게 답한다. “뜻(志)을 하나로 모은다면, 귀로 듣기보다는 마음으로 듣고 마음으로 듣기보다는 기로 듣는다네.… 기야말로 텅 비우고 사물을 대할 수 있는 존재이지. 오로지 도만이 텅 비움(虛)을 이룰 수 있고, 이 텅 비움이야말로 바로 마음을 씻는 것이라네.” 사심을 버리고 뜻을 순수하게 할 때, 신체의 부분적 기능이나 마음의 때를 벗어 기로서 사물을 대할 수 있다. 기로서 사물을 대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텅 비우고 대하는 것이며, 도가 그 과정을 이끌 때만이 그런 허(虛)의 단계에 도달할 수 있다. 바로 그런 과정이 마음-씻음 즉 심재의 과정이다.

장자의 사유에서 분명하게 나타나지는 않지만 심재의 과정은 또한 마음속의 범주들(categories)을 무너뜨리는 과정이기도 하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일정한 범주적 틀이 존재하며, 그 틀을 통해서 사물들을 본다. 즉, 사물들을 진정으로 보기 이전에 이미 범주가 작동한다. 그리고 그 범주-틀은 많은 경우 경험을 통해서 형성되기보다는 이미 개념적으로 정리된 사유의 수용을 통해서 형성된다. 그때 사람은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사물을 대하기보다는 다른 곳에서 형성되었고 자신에게 주입된 틀을 그 사물에 투사한다. 범주란 기본적으로 동일성의 체계이다. 사사로운 차이들을 솎아내고 일반화함으로써 동일성의 체계가 형성된다. 그러나 사물들의 세심한 차이들에 주목하는 사람이 예술가가 된다. 나무의 변화에 민감한 사람이 목수가 되고, 얼굴의 차이들에 민감한 사람이 초상화를 그린다. 심재의 과정이란 마음속의 격자들을 무너뜨리는 과정이며, 격자가 무너질 때마다 사물들은 그때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추한 육체를 소유한 자들의 덕을 칭송하는 「덕충부(德充符)」의 이야기는 이런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미(美)란 규격화된 몸과 규격화된 마음을 벗어나 사물을 사물 자체로서 순수하게 대할 때 성립하는 것이다.

예술의 경지는 마음의 깨달음에 달렸다

예술이란 기술에서 출발한다. 서구에서는 기술과 예술이 혼합된 ‘테크네’(techn)에서 출발했으며, 중국에서는 ‘여섯 가지 기능’(六藝)에서 출발했다. 지금도 예술은 우선 기술적 숙련과 토대를 요구한다. 일상생활에서의 평범한 예술은 대개 기술적 경지를 통해서 성립한다. 그러나 예술의 좀더 차원 높은 경지는 기(技)를 도(道)로 승화시키는 데에 있다. 이 도는 (서구의 경우처럼) 지적인 경지를 뜻하기보다는 오히려 마음의 깨달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술의 비롯한 모든 분야들이 자본주의와 대중문화의 공세 아래에서 신음하고 있는 오늘날, 사판이 이판을 압도하는 오늘날, 장자에서 연원하는 동북아의 고전적인 예술관을 되돌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필자 이정우(42)씨는 충북 영동에서 태어나 서강대 철학과 교수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현재는 철학아카데미 원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담론의 공간><가로지르기><인간의 얼굴><시뮬라크르의 시대><삶·죽음·운명><접힘과 펼쳐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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