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avobo

Friday, October 27, 2006

지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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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체란 무엇이며 왜 중요한가?
지젝에게 코기토는 자연의 모든 것들이 부정된 이후의 텅 빈 장소, 즉 공백이다. 주체는 자연에서 문화로 이행할 때 "사라지는 매개자"로 기능하는 것이다. 우리는 실재로부터 상징계로 진입하면서 주체를 잃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주체는 언제나 그 상실을 회복하고자 하지만, 오히려 주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토대를 외재화시킨채로 둘 수밖에 없다(ex-timacy). 이렇게 상징계에 종속되는 과정이 곧 주체화과정이다. 그러나 여기에 저항할 수는 없는가? 지젝에 따르면 사람들은 상징계의 요소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엮어내는 서사적 능력을 갖고 있어서, 주체는 변하지 않는 공백으로 남지만 "자기(self)"는 반복하여 갱신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미 우리의 "자리"가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이것이 저항적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주체에 대한 강력한 이론화와는 달리, 대안에 대한 지젝의 이론화는 늘 빈약한 느낌을 준다. 기껏해야 "의미화실천"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 의심스럽다.

(2) 포스트모던의 끔찍한 탈근대성
국내에 "성찰적 근대화론자"로 알려진 기든스, 벡, 래쉬/어리 등은 후기 근대를 "위험사회"로 명명하면서도 동시에 자아의 성찰성/재귀성(reflexivity)이 갖고 있는 긍정적 가능성에 주목하였다. 물론 그것이 "폭주하는 자동차"와 같은 불안한 것임을 경고하였지만, 환경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재귀적 자아가 갖고 있는 잠재력은 생산적 희망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젝은 재귀성의 의미를 완전히 뒤집어버린다. 대타자의 권위가 사라져버린 상황에서 사람들은 재귀적으로 "사적인 법(지배종속관계, 새도매저키즘)"에 얽매이게 된다는 것이다. 귀환한 초자아는 쾌락을 명령하고 사람들은 오히려 스스로를 규제하게 된다. 이와 같은 지젝의 논증은 실제 사례에 적용하기도 어렵지 않고, 경우에 따라서는 매우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그간의 성찰적 근대화론을 자신있게 끌어와 반박할 정도로 이론적으로 엄밀한 것은 아니다. 하나의 반례 정도로 생각하면 충분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다른 방식으로 통제를 원하는 "경향"이 있고 그것이 현대 사회의 "징후"라는 것은 전적으로 납득가능하다. 이와 같은 현대인의 딜레마를 해소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지젝은 놀랍게도 아예 이런 조건 자체를 없애는 것을 제시한다. 상징적 질서를 거부하고 혁명을 일으키자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방향으로?! 내게는 이것이 히스테리컬한 비약으로만 느껴질 뿐이다. 후기 근대적 자아가 갖고 있는 재귀성을 무력화시킨 이후에도 사회혁명이 가능한가?!

(3) 이데올로기에서 현실을 구분해내는 법
내게 가장 익숙한 논의이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지젝의 주장들 중 하나를 다룬 챕터이다. 슬로터다익이 제안한 공식, "그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을 잘 알지만, 여전히 그렇게 행동한다"는 명제는 냉소적 주체의 등장을 알린다. 지젝은 그의 논의를 받아들인다. 즉 이데올로기는 앎의 문제가 아니라 행함의 문제이다. 따라서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는 오히려 이데올로기 기계로서, 의식보다 행위로 먼저 이루어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알면서도 그대로 행동하는 인형같은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사실 냉소하지 않으려는 결단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지젝은 오늘날에도 이데올로기 비판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토대로서 냉소적 주체론을 활용했을지 모르지만, 사실 정치적으로 무감각한 사람들을 마주하고 있는 나로서는 냉소적 주체를 극복하는 것은 매우 절실한 문제다. 냉소적 주체가 확신하고 있는 것과 달리, "세계는 이항대립이 아니라 삼원체계이고 여기서 이데올로기는 상징계와 실재 사이의 유령같은 보충물과 같은 것으로 기능한다"는 것을, 그들이 간파하게 되면 상황이 달라질까?! 결국 지젝은 실재를 직시하고 구분해내라는 말을 하고 싶어하는 것이라는 점을 잘 안다. 그러나 실재에 접근하기 위한 보다 즉물적인 방법으로 우리는 "냉소적 주체"를 대체할 새로운 주체의 모습을 창안할 수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이입"이라든가. 예전에 수업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어쨌든 삼원체계 모델은 많은 통찰을 주는 것이어서 여러가지 복잡한 생각을 하게 만든다. 최근 나는 "몸"을 이론화하는 방식을 고민하고 있다.)

(4) 같은 행성에서 온 남성과 여성, 그 사랑의 이데올로기
"성 관계는 없다", "여자는 남자의 증상이다"와 같은 센세이셔널한 명제를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지젝의 사상들 중에서 가장 불만족스러운 부분이다. 지젝 특유의 독창성이나 흥미로움이 다소 반감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페미니스트들에게는 특히 비판적으로 접근되었던 논의인데, 사실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정신분석학이 효과적으로 반박되었던 적은 거의 없으며 이 책에 소개된 주디스 버틀러의 반론도 다소 부적절하게 느껴진다. 정신분석학에 대한 메타비판보다는 차라리 (지젝처럼) "창조적 오독"을 통해 그것을 페미니즘에 생산적인 방식으로 전유하는 것이 더 낫다. 사실 성적 차이는 실재적인 것이어서 상징화가 불가능하며, 결국 이 둘의 관계는 실패한다는 지젝(그리고 라캉)의 논의를 거부하기는 어렵다. 15년쯤 전에 필리프 쥘리앵은 사랑은 "두 개의 오해가 서로 겹치는 것", 즉 실패한 행위라고 썼다. 이 때 쥘리앵은 실패는 곧 성공이라는 윤리학적 입장을 취하는 반면, 지젝은 사랑은 성 관계의 불가능성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라는 입장을 취하는 듯 싶다. 내게는 두 가지 입장이 모두 불충분하게 느껴지고, 라캉에 기반하면서도 좀더 정교한 제3의 태도가 가능하다고 보고 있는데 아직 답을 내린 것은 아니다.

(5) 인종주의는 왜 항상 환상인가?
이 챕터는 지금까지 살펴본 지젝의 이론으로 인종주의를 분석하고 있으며, (1) (2) (3)과 밀접하게 얽혀있는 부분이다. 인종주의는 진정 환상이다. 인종적 타자는 우리의 향락을 훔치려고 하거나, 아니면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향락을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에 대한 상식이 증가하고, 다문화주의가 힘을 얻고, 인권과 평등에 대한 도덕적 가치가 확산되더라도 인종주의는 여전히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현대인들은 자신의 인종차별적 행위를 다양한 지식을 동원하여 정당화하기까지 한다. 이와 같은 태도는 논리적 설득으로 타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완벽하게 자기충족적인 설명 속에서 우리는 무슨 대안을 찾을 수 있는가?! 지젝은 고육책으로 세 가지 방안을 제시하는데 솔직히 이것은 대안이라기보다는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로 다가온다. 첫째, 환상의 윤리학. 둘째, 시민사회보다는 정부를 지지할 것. 셋째, 환상을 가로지르기. 첫번째는 너무 절충주의적이고 봉합적인 것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세번째 방법과 양립할 수 있는지조차 모르겠다. 두번째 주장은 민족주의라는 아킬레스건을 갖고 있는 사회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대안이라는 점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선택할 수 있는 사안들은 한정되어 있다. 인종주의는 디아스포라 시대에 더더욱 면밀하게 다루어져야 할 것으로, 이보다는 훨씬 더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일상의 대안들이 필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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