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avobo

Tuesday, November 14, 2006

기원상의 논란은 있지만, 예술은 관찰과 기술에서 탄생했다. 관찰을 낯선 사물을 응시하는 정신적 활동이라고 한다면, 기술은 생활에 유용한 도구를 만들기 위한 육체적 활동이다.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문자도 관찰의 산물이다. 상형문자가 여기에 속한다. 사물의 관찰과 그 추상화 형태가 상형문자다. 인류사 초기에 문자는 그림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음성문자가 고착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그런데 문자가 발명되면서 문자는 문자 이상의 의미를 표현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은 이후의 일이다. 그래서 언어 자체에는 실용성과 비실용성의 의미가 모두 들어 있다.

관찰에 의해 문자가 발명되었다면, 기술에 의해 도구가 발명되었다. 그런데 도구를 만든다는 것은 유용성을 목적으로 하는데, 도구를 만드는 과정에서 유용성과는 다른 요소가 첨가되기 시작했다. 예컨대 화살촉의 경우에도 그 모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짐승을 잘 잡을 수 있도록 끝이 뾰족하면 그만인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예쁘게 만들곤 했다. 발견된 화살촉만 하더라도 수백가지 종류라고 한다. 꾸민 인위적 흔적이 유용한 도구에 나타나 있다.

관찰과 기술은 실용적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항상 비실용적 목적을 동반하고 있다. 인류가 자기 생존을 위해 관찰과 기술이라는 생존활동을 영위하는 과정에서 항상 실용성 이상의 무엇인가가 나타났다. 한자라는 문자의 경우에도 서예라는 예술적 형태를 얻었고 화살촉이라는 기술의 경우에도 예쁜 화살촉이 만들어졌다. 이렇게 생존활동 과정에서 등장한 비실용적 측면이 예술이라는 형태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술은 생존을 위한 실용적 목적에서 나온 부산물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예술을 아무리 비실용적이라 해도 근원적으로 실용적인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비실용성이 실용성에서 연유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예술은 처음부터 생존을 영위하는 수단에 불과했던 것이다.

관찰과 기술의 실용적 측면과 비실용적 측면이 분리되면서 비실용적 측면이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 아름다움이 자체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지는 않았다. 단지 생존 활동 과정에서 나타난 비실용적 측면에 불과하지, 지금 생각하는 아름다움의 내용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고대 원시사회에서 통칭 아름다움이라 부르는 것은 대체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즉 인간의 감각을 벗어나 있는 초감각적인 것이나 자연의 위력과 같은 숭고하고 두려운 경외의 대상을 의미했다.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표현하는 도구가 필요하게 되자 관찰과 기술의 비실용적 측면, 즉 예술이 적격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이란 신도 되고 정신도 되고 조화와 비례도 된다. 그래서 문자와 예술은 항상 '잉여'의 기능을 담당한다.

'잉여'를 포함하는 문자의 기능을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집트에 테우트(Theuth)라는 신에 있는데, 수, 산술, 기하학, 천문학, 장기와 주사위 놀이, 그리고 특히 문자를 창안했다고 한다. 테베에 살고 있던 이집트 왕 태양왕 타무스(Thamus)에게 테우트가 찾아와서 자신의 발명품을 보여주고 이집트인들에게 보급하라고 말했다. 특히 문자는 기억력(mneme)력을 증진시키는, 기억과 지식(Sophos)의 파르마콘(Pharmakon)이라고 자랑했다. 파르마콘은 독과 약을 동시에 의미한다. 타무스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타무스는 문자가 도리어 사람들을 망각하게 만들뿐이라고 말한다. 문자를 사용하게 되면 기억을 실행시키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Psyche) 속에 망각(Lethe)을 산출할 뿐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진리(Aletheia)가 아니라 지혜의 가상(Doxa)만을 보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 무지하게 되는데도 지혜로운 것처럼 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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