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avobo

Friday, April 07, 2006

들뢰즈의 미학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심광현


1. 존재론과 인식론의 기초

1) 표현의 문제(<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 절대적 긍정성을 지닌 자기원인으로서의 실체(스피노자의 경우 실체는 단 하나 즉 신 또는 자연이다)의 각 속성들( 속성들은 무한하나 인간은 이 가운데 사고와 연장이란 두 가지 속성만을 알 수 있다)은 본질의 표현(실체는 속성의 작용을 통해 유한한 양태/사물들을 산출한다. 이 산출된 것이 natura naturata이고, 이것을 산출하는 실체가 natura naturans이다. ; 각각의 속성들은 역동적이고 능동적인 형식으로서 하나의 본질을 다양하게 표현하며 그 본질을 실체에 귀속시킨다. 이런 표현의 평면에서 표현되는 것(본질)은 그것의 표현 작용(속성) 바깥에 어떤 존재도 갖지 않는다. 이래서 실체,본질과 속성,양태들은 모두 하나의 평면에 내재한다. 따라서 실체는 자기 자신을 표현한다. 속성들은 실체의 본질을 표현하고, 실체는 능동적인 속성들을 통해 스스로를 구성하므로 속성들의 작용에 앞서 완성된 것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실체는 발견되거나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생산'된다.----양태는 신 안에 함축된/접혀져 있는 im-pli-que 능력이 펼쳐지는 것이고, 모든 양태는 신 안에 주름pli으로 존재하고, 신이 그 주름을 펼치면ex-pli-quer 양태들은 관념과 존재로 나타난다(<라이프니츠와 바로크>)--신이 절대적 타자인 부정신학('숨은 신')과는 달리 스코투스의 긍정신학으로 실체의 단성성이 보장된다. 존재의 양상은 변하지만 그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속성들은 각각 상이한 형식이지만, 동일한 의미로 실체를 표현한다. 실체는 자기-구별 능력을 지니며 차이를 생산한다.

2) 능력potentia/puissance ; 존재할 수 없는 것은 무능함이고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능력/힘이다.절대적으로 존재하는 능력은 모든 사물을 생산하는 능력으로 연장된다. 그리고 신은 절대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갖는데, 이는 산출된 모든 것을 인식하는 능력이다. 그런데 행위하는 능력(능동성)은 촉발되는 능력(수동성)에 상응한다. 신의 능력이 충만된 것이라면 현존하는 양태는 제한된 능력, 일정정도의 능력을 그 본질로 갖는다. 이는 신적 능력의 일부이다. 현실존재는 연장된 세계 안에서 시간공간의 제한에 따라 일정한 외연을 지닌 부분들로 존재한다. 양태의 외연적 부분들은 외부로부터 규정된다. 스피노자를 따라 들뢰즈는 양태의 본질을 자기 존재를 보존하려는 노력conatus이나 욕구로 규정한다(유지하거나 갱신)....개체들은 역동적이고 상호관련된 전체의 일부(옴살론holism)이다. 환경에 대해서 열려있는 신체는 다른 신체/물체들에 의해서 구성되고,재구성되고 해체될 수 있다. 따라서 내부와 외부는 엄격하게 분리될 수 없다(내부는 선책된 외부이고, 외부는 투사된 내부이다). 신진대사, 지각, 작용/반작용의 빠름과 느림은 세계 안에서 개체들을 구성하기 위해 연쇄를 이룬다....현존하는 양태의 경우 그것의 촉발되는 소질은 다른 양태의 작용에 따른 촉발들affections과 정서들affects로 채워진다.그것은 다른 양태들에 의해 산출되는 것들이어서 자기가 그 원인일 수 없으므로, 적합한 원인을 갖지 못한다. 상상과 감정들이 이런 수동적 촉발에 해당된다. 양태의 본질인 자기보존노력,코나투스는 그것이 지닌 일정정도의 능력에 따라 규정된다. 각신체는 자기보존을 위해 촉발되는 소질의 치대치를 구하므로 능력들간의 투쟁이 벌어진다----> 두 가지 경우 : (1) 한 양태가 그 자신과 일치하고 그것의 관계가 자신의 관계와 합성되는 다른 양태를 만나는 경우(기쁨의 촉발): 이때 양태의 능력은 확대되고,다른 능력과 합성된다. (2) 한 양태가 자신과 일치하지 않고, 그 관계가 자신을 해체하고 파괴시키려는 다른 양태를 만나는 경우(슬픔의 촉발) ; 양태의 능력이 동원되지 않고 반작용에 그치거나 능력을 감소시킨다.--->코나투스는 기쁨을 경험하기 위한 노력이고 행위능력을 증가시키려는 노력이고 기쁨의 원인이 되는 것을 상상하고 그것을 찾으려는 노력이다---코나투스의 다양한 경우(기계적인 것(보존작용,유지작용,존속작용), 동학적인 것(증가시킴,도움을 줌), 변증법적인 것(대립되는 것에 대립함, 부정하는 것을 부정함),,, 동일한 개체에서도 촉발되는 능력은 같지 않다(나이에 따라 차이)

3) 평행론과 적합한 진리 : 심신평행론 ; 정신과 육체 사이에는 어떤 인과관계도 없다. 독립된 두 계열. 여기서는 어느 하나의 우월함도 없고 본질/비본질의 관계도 없다. 정신에서 능동적인 것은 신체에서도 능동이고 신체에서 수동적인 것은 정신에서도 수동적이다(동시성). 관념의 질서 및 결합과 사물의 질서 및 결합은 동일하다....정신은 사고의 법칙에 따라 관념들을 생산하는 정신적인 자동기계로서 오직 사유의 법칙만을 따르며,신체는 물질적인 자동기계로서 오직 연장의 법칙을 따른다....관념들은 사고 안에서 다른 관념들과 인과관계를 맺는다. 스피노자를 따라 들뢰즈는 진리를 관념과 그 대상의 대응으로 정의하는 관점을 부정한다. 대응이론은 형식적 일치만을 제시할 뿐 생산과정을 설명하지 못한다.관념의 참이나 거짓은 대상과 관념의 일치가 아니라 사유 안에서 이루어지는 관념 생산과정에서 판별된다. '적합성'이 새로운 진리기준이 되는데, 적합한 것은 관념과 그것이 표현하는 것의 내적인 일치이며, 적합한 관념은 그 (작용)원인을 표현하는 관념이다.....인식은 일종의 표현으로서 사고하는 행위는 그것에 의해 산출되는 것과 같은 행위이다. 표현되는 것은 표현하는 행위와 분리될 수 없다. 존재와 사고는 (표현 개념에 의해 드러나는) 실천적 관계로 바뀐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처럼 원인을 그것의 효과로부터 인식하지 않고, 원인에 관한 인식을 통해 효과에 관한 인식을 마련하고, 충분한 이유로 알려진 원인으로부터 효과의 모든 속성들을 생성하는 발생적 방법을 제시한다. 사물의 관념 자체는 사물에 대한 규정이 그 작용원인이나 그것이 정의하는 것의 발생을 표현하는 한에서 그 고유한 원인을 표현하고 그 관념을 적합하게 만든다. 적합한 관념은 그것의 원인을 표현함으로써 사고하는 능력을 증대시킨다(스피노자는 철학의 목표를 어떤 사물에 대한 인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인식능력에 관해 인식하는 것이라고 본다). 적합한 관념은 표현적 관념이다. 한 관념은 대상을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고유한 원인을 표현한다.....우리가 적합한 관념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우리는 존재의 구조,연결들에 대해 더 많이 알게되고 사고능력도 커진다(부적합한 관념에서 적합한 관념으로...이를 생산하는 노력은 외적 필연성을 벗어나 자유를 얻는 것이다).

4) 기쁨을 조직하기 : 신체들의 만남과 촉발되는 능력의 형식들 = 신체행동학 ; 신체와 신체의 만남들의 질서 ; 초월적 가치들에 기반한 전통적인 도덕이론에 맞서 원인과 결과의 연쇄로 나타나는 신체들의 힘과 그 효과를 분석하려는 것 ; 신체--(1) 동역학적인kinetic 것으로 신체를 무수한 소립자들의 잠정적인 집합체로 보고, 그것들의 운동과 정지,빠름과 느림의 관계들을 문제삼는다(세로좌표) ; 신체를 형태/형식이나 기능으로 정의하는 기존 방식을 거부 ; 특히 생명의 개별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형태나 그 전개가 아니라 속도 차이들간의 복잡한 관계,소립자들의 감속과 가속간의 복잡한 관계에 주목 (2) 역학적인dynamic한 방식으로, 한 신체가 다른 신체를 촉발하거나 다른 신체에 의해 촉발되는 점, 양자의 크기를 문제삼는데, 신체들간의 차이는 이런 능력들의 정도 차이(가로좌표) ; 자연 안의 모든 개체를 신체들이 서로 촉발하고 촉발되는 관계에서 빚어지는 정서들에 의해 정의, 촉발들은 처음에 이미지들이나 신체적 흔적들을 갖는다. 이런 촉발-이미지affections-image 또는 관념들은 신체와 정신이 촉발되는 특정한 상태를 형성한다. 이 상태들은 이전 상태보다 더 완전하거나 덜 완전한 것을 함축한다. 이런 상태들,촉발들,이미지들,관념들은 일정하게 지속되는데, 이런 지속이나 연속적 변이가 정서affect나 느낌sentiment이다. 촉발은 직접 신체와 정서는 정신과 관련된다. 일하는 말과 경주용 말 사이에는 소와 일하는 말 사이의 차이보다 더 큰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경주용 말과 일하는 말은 다른 정서,또는 다른 촉발되는 능력을 갖기 때문이다. 신체행동학은 각 개체가 지닌 불변적 본질이나 종적 특성 대신에 각 사물을 특징지는 빠름과 느림의 관계들, 촉발하고 촉발되는 능력들을 탐구한다.각 사물에 대해서 이 관계들과 능력들은 진폭, 최대치와 최소치의 역치, 고유한 변이나 변형들을 갖는다. 이런 것들이 정서능력의 도표를 그린다. 각 개체는 자연 안에서 자기에게 적합한 것을 선택한다...식물은 비를 포착하고 거미는 곤충을 포착한다.....우연한 마주침들에서 이루어지는 합성, 신체들의 구체적 운동과 속도들을 중시

5) 가치 : 도덕법칙은 항상 선-악의 가치대립을 규정하는 초월적 심급을 내세운다. 이와 달리 스피노자의 틀에서는 자연에 대한 적합한 인식은 좋은/나쁜 존재양식에 따른 질적 '차이;를 규정하는 내재적 능력을 문제삼는다. 자연에는 선도 악도, 도덕적 대립도 없고, 오직 윤리적 차이만이 있다.....개체는 자연적 차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능력을 증대시켜 능동적이 되려고 노력하고, 나아가 자기-촉발의 능동성에 이르는 지복을 목표로 삼는다. 이성적이고 강하고 자유로워지려는 자는 즐거운 감정들을 경험하도록 그의 능력들을 증대시킨다. 그는 우연한 만남들과 슬픈 감정의 연쇄로부터 좋은 만남들을 조직하고, 자신을 다른 신체와 합성하고, 본성상 그와 일치하는 것을 통일시키고, 나아가 사회적 평면에서 개인들 사이에서 이성적 연합을 형성하려고 한다---수동성을 능동성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길의 모색 ; 노예-독재자-종교적 사제(슬픔을 삶의 동력으로 삼는 인간형)에서 주인(능동적인 힘과 긍정적인 권력-의지)이 되는 변형의 지점 ; 노예=슬픈 간점에 빠진 인간/독재자=자신의 능력을 확보하기 위해 타인의 슬픈 감정을 이용하는 인간/종교적 사제=인간 조건,인간 일반의 감정들에 비관적인 자---도덕주의적 삼위일체 (스피노자는 슬픈 감정의 연쇄;슬픔 자체,증오,혐오,조소,두려움,절망,연민,분노,시기,겸손,뉘우침,비하,수치,후회,노여움,복수심,잔혹함...나아가 희망까지도(공포를 수반하므로) 슬픔에 포함)

6) 공통관념들을 통한 새로운 합성들 ; 공통관념은 추상적인 보편개념과 구별, 인간의 신체는 한정된 것이므로 일정한 수의 이미지들만을 형성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수를 초과할 때 이미지들/표상들은 혼란에 빠진다. 보편개념들은 바로 이런 혼란스런 관념이다. 가령 인간의 가변적인 감각적 특징들을 자의적으로 추출하여 인간을 직립한 동물, 웃는 동물, 이성적 동물 등으로 보는 보편개념의 예....감각적 형태나 기능이 아니라 내적 구조들(신체 부분들 사이에서 맺어지는 관계들의 체계)...이 관계들의 변화를 통해 감각적 차이들 대신에 지성적 유사성을 파악하고, 신체들의 관계를 '내적으로' 이해하는 것 ; 공통관념은 우리의 촉발되는 능력을 표현하고 인식하는 능력에 의해 표현된다. 그런데 추상관념은 우리의 촉발되는 능력을 넘어서고 인식 대신에 상상하는 데 만족한다(들뢰즈는 공통관념이 물리학적이거나 수학적이라기보다는 생물학적임을 강조한다)....공통관념은 추상개념들이 아닌 일반개념들로서 필연적으로 적합한 것(공통관념은 추상개념과는 달리 기관,형태,조직 등이 아니라 구체적인 운동이나 정서관계에 주목한다)....일반성의 정도에 따라 보다 더 보편적이거나 덜 보편적인 공통관념들....두 신체들 간의 차이를 넘어 그것을 연결할 때 일반성을 넓혀가는 관점....서로 맞서는 두 신체에 매개항들이 개입되면 양자가 하나의 전체로 결합될 수 있다.-----철학기계란 하나의 안경이자 도구(pragmatics)로서, 내재적 구도에서 개체의 능력을 파악하면서 개체들의 능력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을 부정하고,이를 최대화하는 방식으로 사용할 것을 권장 ; 능력의 긍정적 사용을 동력으로 삼아 자유를 지향하는 분자적 역동성을 따라가며, 운동과 변화가 가득찬 힘의 세계를 탐구 ; 여기에는 어떤 고정점도 없으므로 무한한 운동이 가능한데,중심없는 사건들의 계열이 내재적 구도에서 무한하게 운동한다....개체의 본질이 자기보존노력, 욕망-기계(자기조직하는 자연이자 우주)


2. <칸트의 비판철학>과 미학적 해석

1) 칸트의 능력론(인식능력, 욕구능력,쾌불쾌의 감정: 능력들의 상위형식--오성(지성,순수이성),이성(실천이성) ; 입법적 기능,판단력(상상력)은 입법적 기능을 가지지 않는다)의 독창성은 능력들의 상위형식이 능력들의 본성상의 차이를 제거하지 않으며 또 능력들을 결코 인간의 유한성과 떼어서 보지 않는다는 것 ; 독단론은 주체와 대상 사이의 조화를 주장하고 이 조화를 보증하기 위해 무한한 능력을 지닌 신을 끌어들였다. 첫 두 비판은 이를 유한한 주체에 대한 대상의 필연적 종속의 이념으로 대체한다. 우리는 입법자이기는 하나 유한자로서 그러한 것이며 도덕법칙조자 유한한 이성의 사실이다. 이것이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다....마지막 비판에서는 입법적 기능을 가지지 않는 자유로운 상상력을 통해 능력들의 자유로운 일치(자유로우며 규정되지 않은 일치)를 찾아냈을 때 그는 조화와 합목적성의 이념을 재도입=능력들 사이의 합목적적 일치(주관적 합목적성)와 자연과 능력들 사이의 우연적 일치(객관적 합목적성) ; 그러나 이는 능력들의 합목적적 일치는 특정한 발생의 산물이며, 자연과 인간의 합목적적 관계는 바로 인간의 실천적 활동의 결과라고 보는 한도에서 재도입된다.....궁극목적(이성적 존재들의 조직 안에 내포된 그 자체 현존의 이유로서의 자유 ; 실천적 합목적성과 무조건적 입법성의 절대적 통일)은 단지 실천이성의 개념일 뿐이다.

2) 느낌의 상위형식은 있는가? 즐거움 혹은 고통이라는 주체의 상태를 선험적으로 규정하는 표상은 있는가? 감각은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느낌의 능력은 오직 자신의 원리 속에서 무관심해짐으로써만 상위형식을 얻을 수 있다. 상위의 즐거움은 순수 판단력, 즉 순수판단작용의 감성적 표현 , 미감적 판단에서 찾을 수 있다. 어떤 표상이 그러한가? 대상의 순수형식의 표상, 형식은 특정한 대상에 대해 상상력이 행하는 반성 ; 우리는 감각에 미치는 색이나 소리의 질적 효과를 내용적 측면에서 파악하는 대신에 여러 가지로 구성될 수 있는 변형들을 우리가 상상력을 통해 반성할 수 있다면 아마도 그때서야 색이나 소리는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질적인 것은 형태와 구성이며 이들은 형식적 반성을 통해 드러난다. 여기서 대상의 질료적 현존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느낌의 능력은 어떤 영역도 가지지 않는다. 즉 현상도 물자체도 가지지 않는다. 이 능력은 오직 능력들의 활동을 위한 주관적 조건만을 표현할 뿐이다....능력들 사이의 자유로우며 규정되지 않은 지성의 일치, 이 일치가 바로 미감적 공통감각(취미)를 규정한다. 이는 지성적으로 알려질 수 없고 오직 느껴질 수 있을 뿐이다....이 자유로운 주관적 조화를 이룰 수 없다면 가 가운데 어떤 한 능력이 입법적이며 규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3) 숭고의 문제 : 미감적 판단의 경우는 이성은 아무런 역할을 갖지 않고 다만 지성과 상상력이 개입될 뿐이고, 즐거움의 상위형식은 발견되나 고통의 상위형식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숭고의 경우 상상력은 형식적 반성과는 완전히 다른 활동을 한다. 숭고의 느낌은 무형 혹은 기형(고아대함 혹은 강력함)에 직면할 때 체험된다. 이때 모든 과정은 마치 상상력이 자기의 고유한 한게에 직면하게 된 것처럼, 자기의 최대에 도달하도록 강요된 것처럼 진행된다. 그리고 상상력은 자기능력을 극단까지 몰고가는 맹렬함을 체험한다.이 극단에 가면 상력은 총괄의 최대에 이르는데, 이 한계를 확장하려하다가 불충분함을 체험하고 위축된다. 여기서 상상력은 자신의 모든 능력이 전체로 통일시키려는 이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님을 시인하도록 하는 것이 이성임을 알게 된다. 여기서 상상력과 이성 사이의 주관적 관계와 만나게 된다.그러나 이 관계는 우선 일치보다는 오히려 불일치이다. 즉 이성의 욕구와 상상력의 힘 사이에서 체험하는 모순이다. 이때문에 상상력은 자유를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고 숭고의 느낌은 즐거움보다는 고통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이 불일치의 심층에는 일치가 있다. 즉 고통은 즐거움을 가능케 한다. 모든 능력들의 규정되지 않은 초감성적 통일을 감지, 여기서 이 일치는 단순히 가정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발생한 것, 불일치 속에서 발생한 것이다---광대함에 대한 수학적 숭고(인식능력의 관점), 힘에 대한 역학적 숭고(욕구능력의 관점)

4) 아름다움의 경우는 주관적 일치가 있다.그러나 이 주관적 일치는 객관적 형식에서 형성된다....그런데 자유로운 상상력과 규정되지 않은 지성의 일치는 더 이상 단순한 가정이 아니다(지성개념은 무한한 방식으로 확장되고, 상상력은 지성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또 상상력은 자유롭게 형식을 반성할 수 있게 된다). 어떻게 보면 이 일치는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을 통해 생기를 얻고 활기를 띄며 또 발생한다.....이것은 자연의 아름다움이다....그런데 예술에서 상상력과 지성의 일치는 오직 천재를 통해서만 생명을 얻는다. 천재 없이는 이 둘은 단절된 상태로 남을 것이다. 천재는 다른 천재를 부른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서 취미는 일종의 매개가 된다. 그리고 다른 천재가 아직 출현하지 않았을 경우 취미는 그 출현을 기다릴 수 있도록 해준다. 천재는 모든 능력의 초감성적 통일을 표현하며 그 통일을 살아있는 것으로서 표현한다.그러므로 천재는 자연에서의 아룸다움의 결과들이 예술에서의 아름다움으로 확장될 수 있는 규칙을 제공한다.---이처럼 칸트는 취미의 형식미학에다 내용적인 상위미학을 결합시킨다. 이 상위미학의 두 주요 항목은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과 천재이다(낭만주의). 선과 구성의 미학(형식미학)에다 내용,색,소리의 상위미학을 결합시킨다.성숙한 고전주의와 이제 막 싹트는 낭만주의는 판단력 비판 속에서 복잡한 균형을 이룬다.----판단력은 진정한 타고난 재능이며 통찰력(개별을 보편아래 포섭시키는 능력)이다. 판단력을 가진 인간은 언제난 기술을 가진 인간,전문가,의사,법률가이다.칸트는 판단력의 문제를 기술성 혹은 고유한 독창성의 차원에서 다룬 최초의 인물이다....규정적 판단력(주어진 보편이 적용될 개별을 규정하는 것-이성의 필연적 사용)/반성적 판단력(개별을 통해 보편을 찾아내는 것-이성의 가정적 사용 ; 탐구의 원리,발견의 원리)......반성적 판단력만이 창조성을 함축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이 주어졌을 때조차 판단력은 포섭을 행해야 한다(장티푸스 개념은 알지만 개별적 경우 속에서는 티푸스를 식별하지 못하는 의사가 있을 수 있다). 지성 개념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의 창조적인 산물인 도식이 개별적 경우들이 개념 아래 포섭될 수 있는 조건을 지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규정적 판단력의 경우 기술(심연)은 숨겨져 있다. 이런 숨겨진 기술(심연)은 반성적 판단력 속에서 표면화되고 자유롭게 작용한다. 반성적 판단력은 모든 능력들간의 자유롭고 규정되지 않은 일치를 표현한다. 판단력은 그저 하나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들의 일치 속에 있다.

5) 목적론(자연을 그 대상으로 하되 인과론이 아니라 상호성의 범주가 적용되며, 물리학이 아니라 생물학이 모델) : 여기서는 주관적이 아니라 객관적이며 형식적이 아니라 내용적인 합목적성이 문제 ; 반성의 의미가 바뀌어 대상의 내용에 대해 반성.여기서는 이성,지성,상상력의 자유로운 규정되지 않은 일치...반성의 즐거움...그러나 형식적 미감적 합목적성이 내용적 목적론적 합목적성 개념을 형성하도록 준비하게 한다. 개념 없는 반성이 반성개념을 형성하도록 준비하게 한다. 목적론적 공통감각은 미감적 공통감각을 통해 시작된다. 반성적 판단력은 합목적성의 원리를 완성하고 자연에 적용...자연에서 자유로, 인식능력에서 욕구능력으로,사변적 관심에서 실천적 관심으로의 전이를, 자연 안에서의 자유의 실현을 준비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3. <대담>

* 니체가 말한 바 대로, 예술가 혹은 철학자는 문명의 의사...기호들은 분출하는 삶 혹은 고갈된 삶의 징후들....글은 아직 언어를 갖추지 못한 미래의 민중을 위해 쓰여지는 것. 창조한다는 것은 전달이 아니라 저항한다는 것..기호들과 사건,삶,활력론 사이에는 깊은 관계가 있다. 비족직 삶의 힘,그림,글쓰기,음악 등의 선 속에 담겨 있는 힘이 바로 그것....나로서는 반성을 대신하는 것이 구성주의이며 전달을 대신하는 것이 일종의 표현주의....
* 사유의 이미지는 철학의 가정과 같은 것...비철학적 이해가 아니라 선철학적 이해와 같은 것....개념의 창조를 이끄는 것은 사유의 이미지이다. 개념이 노래와 같다면 사유의 이미지는 외침과 같은 것....사유의 이미지에 대한 연구는 정신론noologie,,,근경이란 나무들의 이미지 아래 뻗어나는 사유의 이미지와 같은 것...두뇌의 인지상태, 두뇌미생물학....두뇌는 근경과 비슷...개연적,반임의적,양자적 구조를 가진 하나의 불확실한 체계.......영화의 화면이 두뇌와 같다는 것. 영화는 합리적 절단을 통한 연결(이미지-운동 체제,진실의 모델,결정적 체제)로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비합리적 절단을 통한 재연결(이미지-시간 체제, 생성으로서의 허위의 힘,야생적, 고딕적인 강한 활동력) 역시 영화를 만드는 것.....
* 상상이란 옳은 개념인가? ; 우선 현실-비현실의 관계가 있다. 베르그송 식으로 현실은 현시적인 것들의 합법적 결합 혹은 연장적 연결이고, 비현실은 의식 속에 갑자기 불연속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잠재적인 것이 현시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진실-허위의 관계가 또 있다. 현실-비현실의 구별이 판별되지 않을 때 허위가 있다. 허위는 착오 혹은 혼동이 아니라 진실을 결정불가능하게 만드는 힘이다. 상상은 비현실이 아니라 현실과 비현실이 판별되지 않는 것이다. ...상상한다는 것은 이미지-결정체들을 만든다는 것, 이미지를 결정체처럼 작용하게 한다는 것이다.그것은 현시-잠재,투명-불투명,중심-주위의 3중 회로를 따라 작용한다...결정체 속에서 보이는 것은 자율화된 시간,운동으로부터 독립한 시간,허위운동을 끊임없이 발생시키는 시간의 관계들이다.
* 영화와 철학의 관계는 이미지와 개념의 관계이다. 하지만 하나의 개념 속에는 이미지와의 관계가 담겨 있고 이미지 속에는 개념과의 관계가 담겨 있다. 영화는 사유의 이미지, 사고의 메카니즘을 그려내려고 했다....기호란 구성적,생성적 관점에서 포착된 이미지이다.항상 나의 관심을 끈 것이 바로 기호의 개념이다.영화는 자기 고유의 기호들을 생산하고 분류해낸다. 하지만 그것들이 일단 생성되면 다른 곳으로 파급되어 세계가 영화를 만들어내기 시작한다...영화는 이미지의 자동운동을 만들어낸다...이미지의 특이성=이미지는 스스로 정의되는 형상이다. 이미지가 보편적으로 표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내적 특이성을 통해 특수한 점들을 연결 표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 개념은 두개의 다른 차원, 즉 지각percepts과 감동(정동)affects의 차원을 내포한다.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이것이지 이미지가 아니다. 지각은 지각작용perception과는 다른 것으로 그것을 체험하는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남아있는 감각과 관계의 꾸러미이다. 감동은 또한 감정sentiment과 다른 것으로 그것을 겪는 사람 밖으로 넘쳐나는 생성이다(그것을 통해 그는 다른 사람이 된다) 위대한 영국 혹은 미국 소설가들은 주로 지각을 통해 글을 쓴다. 클라이스트,카프카 등은 감동을 통해 쓴다. 감동,지각과 개념은 분리할 수 없는 세 개의 힘이다. 그것들은 예술에서 철학으로 혹은 철학에서 예술로 흘러든다....철학은 직접적으로 비철학자들에게 말을 건네는 것(스피노자)...니체에게는 반대로 철학 속에서 살아있는 자를 죽이는 지식의 과도함이 있다. 비철학적 이해는 불충분하고 임시적인 것이 아니다. 전체의 반쪽이며 두 날개 중의 하나이다.


4. 시네마

1. 운동에 대한 테제들 : 베르그송에 대한 첫 번째 주석

1) 첫 번째 테제 : 운동과 순간
* 제1테제 : 덮힌 공간은 과거이지만, 운동은 현재, 덮는 행위이다. 덮인 공간은 모두 무한히 분할 가능한 동일하고 동질적인 공간이지만, 운동들은 이질적이고 서로 환원 불가능하다.-->실제운동은 항상 구체적인 지속 속에서 발생 / 움직일 수 없는 단편들을 가지고는 운동을 재구성할 수 없다.---><창조적 지속>(1907)에서 영화는 우리에게 거짓 운동을 준다고 명명. 베르그송은 영화가 움직일 수 없는 단편들을 가지고 운동을 재구성할 때 그것은 단지 가장 고대적인 사유(제논의 역설)에 의해서 이미 실행된 것, 혹은 자연적 지각이 실행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 그러나 현상학은 영화를 자연적인 지각의 조건들과 단절하는 것으로 본다.---영화는 우리에게 운동이 부가되는 이미지를 주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운동-이미지를 준다. 그것은 우리에게 움직일 수 있는 단편을 준다. 그러나 베르그송은 1896년 <물질과 기억>에서 운동-이미지를 발견했다.
* 베르그송의 첫 번째 테제는 한편으로는 덮인 공간을 가지고서 순간적이고 움직일 수 없는 단편들과 추상적인 시간을 서로 덧붙임으로써 운동을 재구성하려는 모든 시도에 대한 비판이 존재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환상적인 시도의 하나이자 정점이라고 비난받는 영화에 대한 비판이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영화의 미래나 본질을 예시하는 <물질과 기억>의 테제들, 움직이는 단편들 역시 존재한다.

2) 두 번째 테제 : 특권화된 순간과 무규정적인 범용한 순간들
* 고대에는 운동이란 지성에 의해 알수 있는 요소들, 즉 움직일 수 없는 형식들 또는 이데아들에 준거. 운동은 단지 형식들의 변증법을 표현할 뿐이다. 운동은 하나의 형식에서 다른 형식으로의 규제된 이행, 춤에서의 포즈들, 특권화된 순간들의 순서
* 근대과학혁명의 핵심은 운동을 특권화된 순간들이 아니라 범용한 어떤 순간에든 관계시키는 데에 있다. 운동의 재구성은 형식적인 선험적 요소가 아니라 내재적인 물질적 요소로부터 이루어졌다. 모든 곳에서 순간들의 기계적인 연속이 포즈들의 변증법적인 질서를 대체하였다. 근대과학은 시간을 독립변수로 삼으려는 열망에 의해 정의된다. 영화는 베르그송이 추적하는 이런 계보의 마지막 후손 ; 교통수단(기차, 자동차, 비행기...)의 계열과 이에 병행하는 표현수단(다이어그램, 사진,영화...)의 계열.
*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특권화된 순간들 위에서 번창하는 것 같다. 에이젠슈타인은 운동이나 발전으로부터 어떤 위기의 계기들을 추출하여 영화의 주제로 만들었다고들 말한다. 그는 정점들과 함성들을 집어내고, 장면들을 절정으로 밀어붙이며 충돌하게 한다. 그러나 그나 다른 감독의 특권화된 순간들은 여전히 범용한 순간이다. 이것이야말로 에이젠슈타인이 호소하는 현대적인 변증법과 낡은 변증법이다. 후자가 하나의 운동 속에서 현실화되는 선험적 형식들의 질서라면, 전자는 운동에 내재하는 특이점들을 생산하고 대면하는 것이다. 이 특이성들의 생산(질적 도약)은 진부함들의 축적(양적 과정)에 의해 성취되며, 특이한 것은 범용한 것으로부터 획득된다. 무규정적인 범용한 순간은 다른 것으로부터 등거리에 있는 순간이다.---> 이러한 체계는 예술도 과학도 아니었다.
* 그러나 동시대인들은 예술 속에서 진행되던 하나의 발전에 민감. 운동을 범용한 순간에 관계시켰던 가치들을 자유롭게 풀어놓기 위해 형상들과 포즈들을 버리고 있었다. 베르그송은 영화는 전적으로 운동의 이 현대적인 개념에 속한다고 강조. 그러나 그는 두 개의 길 사이에서 주저 ; (1) 사실 영원한 포즈나 움직일 수 없는 단편으로 운동을 재구성하는 것은 모든 것은 주어진 것이라고 가정하므로 운동을 놓치게 된다. 시간은 영원성의 이미지에 불과한 것이 디거나 세트의 결과가 된다. (2) 고대의 개념이 영원한 것의 사유를 목표로 삼는 고대철학에 밀접하게 상응한다면, 현대적 개념과 현대의 과학은 또 다른 철학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현대과학에게 그에 상응하는 형이상학을 선사하는 것. 영화가 여기서 본질적인 요인이며, 새로운 사유 또는 생각하는 방식의 탄생과 형성에서 역할을 지님.

3) 세 번째 테제 : 운동과 변화.
* 순간이란 운동의 움직일 수 없는 단편일 뿐 아니라, 운동 또한 지속의, 즉 전체 또는 하나의 전체의 움직일 수 있는 단편이다. 운동이 지속 또는 전체 속의 변화를 표현한다는 것. 물질은 운동하지만 변화하지 않는다. 운동은 공간이다. 이제 매 시간마다 공간 속에서의 부분들의 이전이 존재하고, 하나의 전체 속에서의 질적인 변화가 또 존재한다.
* 움직일 수 없는 단편들 = 움직일 수 있는 단편으로서의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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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 질적 변화
(환상을 표현) (실재를 표현)
* 베르그송에 의하면 전체는 주어진 것도 아니며 주어질 수도 없다.(근대과학의 오류는 전체를 주어진 것으로 간주하는 데 있다). 보통은 여기서 전체는 의미없는 개념이라는 결론을 도출. 그러나 베르그송은 전체가 주어질 수 없다면 그것이 열린 것이기 때문이고, 전체의 본성이 항상 변화하며, 새로운 어떤 것을 발생시키며 지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는 의식이란 전체의 열림과 일치함으로써 전체에 대하여 스스로를 개방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고 논증-----관계들은 대상이 아니라 전체에 속한다. 세트의 대상들은 공간 속의 운동에 의해서 그들 각자의 위치들을 변화시킨다. 그러나 전체는 관계를 통해서 변형되거나 질적으로 변화된다. 세트들은 항상 닫혀져 있고, 닫혀져 있는 모든 것은 인위적으로 닫힌 것이다.---세트들은 공간 속에 존재하고(움직일 수 없는 단편+추상적 시간), 전체 또는 전체들은 지속 속에 존재하며 멈추지 않는 한 지속 그 자체라는 것이다(실제운동-->구체적 지속).
* (1) 판별할 수 있는 대상들이나 부분들에 의해 정의되는 세트들 또는 닫힌 체제들 (2) 이런 대상들 사이에서 확립되고 그 각가의 위치들을 변경하는 이전의 운동 (3) 지속 또는 전체, 자신의 관계들을 따라 부단히 변화하는 정신적 실재.--->운동은 두 가지 국면을 갖게 된다 : 대상들 또는 부분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과 지속 또는 전체를 표현하는 것.--->운동을 통해서 전체는 대상들로 분할되고, 대상들은 전체 속으로 재통합되며, 그 둘 사이에서 전체는 변화한다.---><물질과 기억> : (1) 순간적인 이미지들, 즉 운동의 움직이지 않는 단편들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2) 지속의 움직이는 단편들인 운동-이미지들이 존재한다. (3) 시간-이미지들, 즉 운동 그 자체를 넘어서는 지속-이미지들, 변화-이미지들, 관계-이미지들, 부피-이미지들이 존재한다.



2. 프레임과 쇼트, 프레임화와 커팅

1) 첫 번째 수준 : 프레임, 세트 또는 닫힌 체계
* 닫힌 체계를 결정하는 것이 프레임화framing. 이것을 영화소(파솔리니)라는 식으로 언어와 비교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런 비유는 언어 체계보다는 정보 체계에서 발견가능. 요소들은 때로는 많고 때로는 적은 제한된 수의 데이터. 프레임은 포화 경향과 희박 경향을 가진다. 포화경향은 대형화면과 시야 심도에 의해 성취 / 최고도의 희박화는 화면이 완전히 검게되거나 희게 될 때. 이 양 경향은 이미지가 단지 보여지기 위해 주어진 것만은 아님을 가르쳐 준다. 그것은 볼 수 있는 만큼이나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 이미지의 희박화나 포화를 서투르게 평가하고 있으나 이미지의 교육학이 존재한다.
* 프레임은 선택된 좌표들과의 관계 속에서 닫힌 체계를 구성하느냐 선별된 변수들과의 관계 속에서 닫힌 체계를 구성하느냐에 따라 항상 기하학적/수학적이거나 물리학적/역동적.(플라톤적이거나 스토아적)
* 다른 한편 체계들의 부분들을 .분리할 경우 기하학적이 되며(이 경우 기하학적 광학),
* 물리적인 단계적 변화들의 대상으로서의 프레임 : 물리학적/역동적(단지 지역이나 지대들로 분할될 뿐인 혼합물, 표현주의적 광학, 내포적 부분,폭풍우의 거대한 혼합 속에서 일출과 일몰, 공기와 물, 물과 대지 간의 구별이 더 이상 불가능한 시간. 여기서 가치들의 계속적인 변형 속에서 부분들이 구별되거나 혼동되게 되는 것은 혼합의 정도에 의해서 ).
* 프레임화의 각도 : 닫힌 체계는 그 자체가 부분들의 세트상의 한 시점에 준거하는 시각체계. 파스칼 보니체르는 사선 원근법이나 역설적인 각도와 동일하지 않고 이미지의 또 다른 차원을 지시하는 비정상적 시점을 지칭하기 위해 '탈프레임화'라는 개념을 구성. 드레이어의 <잔 다르크>의 가장자리에 의해 잘려진 얼굴.
* 시야 바깥은 부정이 아니다. 바쟁의 마스크와 프레임 : 모든 세트가 자신이 소통하는 더 큰 동질적안 세트 속으로 확장되는 움직이는 마스크처럼 작동하고, 때로는 체계를 고립시키고 그것의 환경을 없애버리는 회화적 프레임으로서 작용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전체는 세트들로 하여금 더 큰 세트로 확장되도록 강제, 세트를 횡단하고 각 세트에게 다른 세트들과 무한히 소통할 수 있는, 필연적으로 실현되는 가능성을 부여하는 실과 같은 것, 열려진 것이고 내용이나 공간보다는 시간 또는 심지어 정신과 되돌아 관계를 맺는다.---시야바깥은 두 개의 질적으로 다른 국면을 가진다 : 상대적인 국면에 의해 닫힌 체계는 보이지 않는 세트를 지시하고 이 세트는 다시 보이게 되고, 이는 새로운 보이지 않는 세트를 생겨하게 하는 무한한 과정 / 절대적인 국면에 의해 닫힌 체계는 더 이상 세트가 아니며 가시적인 것들의 질서 속에 속하지도 않는 전체 우주에 내재적인 지속에 대해 열리게 된다.---이 두 국면은 항상 서로 뒤섞인다.---이미지가 공간적으로 닫힐수록 시간이라는 4차원을 향하여, 정신이라는 5차원을 향하여 자신을 젖힐 수 있는 이미지의 능력은 더욱 커진다.

2) 쇼트와 운동
* 커팅은 쇼트의 결정이고, 쇼트는 닫힌 체계 안에서, 세트의 요소들 또는 부분들 사이에서 확립되는 운동의 결정이다. 쇼트는 두 개의 극을 갖는다. 하나는 그것이 요소들, 또는 하위-세트들 사이에 상대적인 변경을 도입하는 공간 속의 세트들과 관계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속 속에서 일어나는 그 절대적인 변화를 쇼트가 표현하는 전체와 관계된 것이다. 따라서 세트의 프레임화와 전체의 몽타쥬 사이의 매개라고 추상적으로 정의될 수 있는 쇼트의 상황은 때로는 프레임화라는 극을 향하는 경향이 있고, 때로는 몽타쥬라는 극을 향하는 경향이 있다. 쇼트란 이러한 이원적 관점에서부터 고찰되는 운동이다.--- 쇼트는 계속적으로 전환과 순환을 보증하는 운동과 같다. 분할하고 재통합. 그것은 의식처럼 작용한다. 그러나 영화적 의식이란 관객이나 주인공이 아니라 카메라이다. 쇼트는, 즉 영화적 의식은 그 사이에서 운동이 일어나는 사물이 계속해서 하나의 전체 속으로 재통합되고 전체는 계속해서 그 사물들 사이에서 분할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하나의 운동을 추적한다( 물의 운동, 멀리 있는 새의 운동, 보트를 타고 있는 사람의 운동...인간화된 자연의 평화로운 전체...그 때 새 한 마리가 급강하하여 사람에게 상처를 입힌다.)
* 쇼트는 운동-이미지이다. 그것이 운동을 하나의 변화하는 전체와 관계시키는 한, 그것은 지속의 움직이는 단편이다. 움직이는 카메라는 자신이 보여주는 모든 이동수단들-비행기,자동차,보트,자전거,발,지하철...-의 일반적인 등가물과 같다. 영화적 운동-이미지의 본질은 운반체 또는 움직이는 물체들로부터 추론된, 그것들의 공통적인 실체인 운동을 추출하는데, 운동들로부터 그것들의 본질인 가동성을 추출하는 데 있다.----영화는 회화보다 더 직접적으로 시간 속의 양감,시간 속의 원근법을 운반해 온다. 그것은 시간적 원근법 또는 변조이다. 사진은 일종의 주조이다. 주형은 사물의 내적인 힘들을 그것들이 어떤 특정한 순간에 군형상태에 도달하는 방식으로 조직한다(움직이지 않는 단편). 그러나 변조는 균형이 도달될 때 중지하지 않으며, 주형을 부단히 변형시키고 가변적이고 연속적이며 시간적인 주형을 구성해낸다.

3) 가동성 : 몽타주와 카메라의 운동.
* 카메라가 고정될 때---원시적 상태 : 운동-이미지보다는 이미지가 운동 속에 존재하는 상태 --이것이 베르그송이 비판한 것.
* 운동-이미지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1) 카메라의 가동성을 통해서, 그 자체가 움직이는 것이 된 쇼트를 통해서 (2) 몽타주에 의해서 : 이는 극히 적은 카메라의 움직임을 가지고도 등장인물들의 운동으로부터 순수한 가동성이 추출되는 것을 허용.
* 쇼트라는 것은 고정된 공간적인 결정들, 카메라와 관계된 공간의 조각들 또는 거리들을 말하기 위한 것; 트래킹 쇼트 / 이동쇼트 / 고정된 장기지속, 즉 시퀀스 쇼트와 시야심도 / 단일의 전경쇼트---이원적 요구, 즉 전체의 요구와 부분의 요구들 사이에 붙잡힌 다양성의 통일 : 전체는 자신의 이상적인 상태를 포기하고 부분들의 몽타주 속에서 실현되어야 하는 종합적 저체가 된다, 역으로 부분들은 선별되고 조정되어 몽타주를 통해서 잠재적인 시퀀스 쇼트 또는 영화의 분석적인 전체를 재구성하는 연결들의 연락들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영화의 본질적인 극점으로서의 거짓 연속성의 문제가 제기 ; 이것은 연속성의 연결도 아니고, 연결 속의 파열이나 불연속도 아니다. 거짓연속성은 의당 세트들과 그것들의 부분들에서 달아나는 열려진 것의 차원이다. 그것은 시야 바깥의 다른 권력을, 이 다른 어떤 곳 또는 이 텅빈 지대를, 이 영화에게는 불가능한 백색 위의 백색을 실현한다. 전체를 파괴하기  커녕, 거짓 연속성은 전체의 행위, 그것들이 세트들과 그것들의 부분들 위에 새기는 각인이다. 진정한 연속성이 정반대의 경향, 즉 자신들로부터 달아나는 전체를 재접합하는 부분들과 세트들의 경향을 재현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말이다.

3. 몽타주.

1) 세번째 수준 : 전체, 운동 이미지의 구성, 그리고 시간의 간접적인 이미지.
* 몽타주는 연속성들, 커팅과 거짓 연속성들에 의한 전체의 결정이다. 에이젠슈타인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몽타주란 영화의 전체, 이념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왜 전체가 몽타주의 대상이어야 하는가? 이 변화하는 전체, 이 시간 또는 지속은 그것을 표현하는 운동-이미지들과의 관계 속에서 간접적으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몽타주는 그들로부터 전체를 풀어주도록 운동-이미지들에 영향을 가하  작용, 즉 시간의 이미지다. 그것은 운동-이미지들과 그것들의 관계로부터 연역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오는 간접적인 이미지다. 이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몽타주는 뒤에 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전체가 특정한 방식으로 일차적이어야 하고 그것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 필요하다.
* 몽타주는 구성, 시간의 간접적인 이미지를 구성하는 것으로서의 운동-이미지들의 배치agencement이다. 시간이 운동의 함수로서, 운동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될 수 있는 많은 상이한 방식들이 있었고, 몽타주의 상이한 유파들이 이에 상응한다.
(1) 미국의 유기적 경향 : 그리피스는 운동-이미지들의 구성을 하나의 조직화, 유기체, 거대한 유기적 통일성으로 이해, 부분들의 총화(세트)--부분들은 평행적인 교호적 몽타주, 클로즈업의 삽입(상대적 차원들의 교호), 수렴적 몽타주
(2) 소비에트 유파의 변증법적 경향 ;
* 에이젠슈타인은 그리피스가 부와 가난이 독립적인 현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일한 일반적인 원인, 즉 사회적 착취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망각한다고 비판. 그는 유기체와 구성의 변증법적 본성을 보지 못했다. 유기적인 것은 정말로 거대한 나서이지만, 그 나선은 경험적으로가 아니라, 발생,성장,그리고 진화의 법칙에 의거하여 '과학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고 주장. 스스로를 둘로 분할하고, 하나의 새로운 통일을 재창조하는 일자의 운동 ; 세트가 부분 속에 반영되고, 각 부분 또는 비틀림이 세트를 재생산, 이것들은 황금분할의 비율 속으로 들어가며, 여기서 가장 작은 부분이 가장 큰 부분에 대해서 가지는 관계는 가장 큰 부분이 세트에 대해서 가지는 관계와 같다.---운동-이미지란 몽타주의 세포이지 단순한 요소가 아니다. 새롭고 더 고차적인 통일성을 형성하기 위해 스스로를 분할하는 일자의 변증법적 법칙 아래에서 대립의 몽타주가 평행적 몽타주의 자리를 차지한다.---차원의 절대적 변화, 압축이며 폭발, 제곱이며 권력 2로의 상승.= 여기서는 유기체만이 아니라 정서의 질적 도약도 문제--견인의 몽타주, 견인의 미적분학, 지적/의식적 몽타주, 가속화된 몽타주, 수직적 몽타주---에이젠슈타인에게서 유기체와 몽타주의 변증법적 개념화는 항상 열린 나선과 영구히 도약하는 순간을 결합한다.
* 푸도프킨은 의식의 진보에 관심
* 도브첸코는 부분들, 세트,그리고 전체의 삼원적 관계에 강박당한 변증법주의자. 세트와 부분들로 하여금 자신들에게 그들 고유의 한계와 균형을 이루지 않는 깊이와 외연을 부여하는 전체 안에 뛰어드는 감독.
* 베르토프는 물질 그 자체의 변증법에 대해 근본적이고 급진적 긍정. 이는 일종의 제4법칙. 영구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물질적 체계에 관심으로 다큐와 뉴스에 열정. 두 체계들 사이, 두 운동들 사이의 이행에 관심, 운동의 간극은 지각, 일별, 눈이다. 그것은 부동적인 인간의 눈이 아니라 물질 속의 눈, 카메라의 눈. ---삶 자체, 영화속의 삶, 영화의 삶--그가 보기에 변증법은 아직도 너무 유기적인 자연, 여전히 너무 정서적인 인간과 단절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다른 세명을 비판, 그는 자연-인간, 자연-주먹의 쌍(유기적-정서적)에 물질-눈의 쌍을 대립시킨다(에이젠슈타인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영화-눈'이 아니라 '영화-주먹'이다").
(3) 전쟁전 프랑스의 양적인 경향
* 아벨 강스 : 일종의 인상주의, 일종의 데카르트주의--이들은 유기적 구성이나 변증법적 구성도 피하면서 운동-이미지의 거대한 기계적 구성을 세웠다. 계량적 관계에 관심. 자동인형과 기하학적 배열.--->추상예술이 등장, 시각적 예술로서 순수운동에 대한 탐구, 여기서는 빛까지도 운동을 위해 존재.--->수학적 숭고.
(4) 독일표현주의의 내포적 경향
* 표현주의는 고체나 유체 속에 잇는 운동의 양의 명확한 역학을 불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들에 의해 난도질되거나 안개 속에 잠기는 모든 것들이 빠져들어가는 어둡고 늪과 같은 생멸을 불러낸다. 유기체와 지혜와 한계에는 잊혀져 있는 사물들의 비유기적인 생명, 무시무시한 생명이 표현주의의 첫 원리. 그것은 생명 있는 것과 생명 없는 것에 공통적이, 그 자신을 생명점으로 끌어올리는 물질과 모든 물질을 통해 확산되는 생명에 공통적인, 힘 있는 前유기적인 배아성이다. 이는 강도에 대한 외연적인 것의 종속이다. 유기적인 재현에 대하 생의 비약. 공간을 서술하는 대신, 공간을 구성하는 '고딕적인' 기하학이다. 사선적인 원근법을 가지고서 그림자의 투영과 확장을 통해 작동하는 폭력적인 조망주의적 기하학--영화에서 진정한 색채주의의 선구자 : 서로 반사하는 강렬화의 정도에 의해 변화하는 색(괴테)의 무한한 폭발---이것은 일종의 동적인 숭고/형태없는 숭고---자연과 정신의 화해를 가정하는 변증법적 발전의 의미를 함축하는 낭만주의와는 달리 표현주의는 인간과 자연의 카오스를 그 배경에 유지. 세계-카오스에 대한 비관주의. 표현주의는 붉은 색 위에 붉은 색을 덧칠하면서 세계 그리기를 계속한다. 그 하나는 사물들의 무시무시한 비유기적 생으로 되돌아가고, 다른 하나는 정신의 숭고하 비심리학적 생으로 되돌아간다.

4. 운동-이미지와 그 세가지 변종들 : 베르그송에 대한 두번째 주석.

1) 이미지와 운동의 동일성
* 통상 의식속에는 이미지만이 있고 공간 속에는 운동만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미지와 운동 , 의식과 사물의 이런 이원론의 극복이 필요하다.-->모든 의식은 어떤 것의 의식이다9훗설) / 모든 의식은 어떤 것이다(베르그송). ---그러나 현상학은 자연적 지각에 특권을 부여하고(운동이 포즈에 관련되어 있다고 보는), 전영화적 조건들에서 정지한다. 반면에 베르그송은 자연적 지각에 특권을 부여하지 않고, 오히려 모델은 항상 '흐르는-물질'이다. 영화는 자연적 지각보다 여기에 가깝다.
* 나타나는 것들의 세트를 '이미지'라고 부르자. 이미지들 전부의 이 무한한 세트는 일종의 내재성의 평면을 구성하다. 이미지느 이 평면 위에서 그 자체로 존재한다. 이미지의 그 자체성은 물질이다. 이미지의 뒤에 숨어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이미지와 운동의 절대적 동일성 그것이다. 이미지와 운동의 동일성은 운동-이미지와 물질은 동일하다는 결론--"나의 신체는 물질이거나 이미지이다."(<물질과 기억>, 5쪽). 운동-이미지=흐르는-물질.--->물질적 우주, 내재성의 평면은 운동-이미지들의 기계적 배치이다. 그것은 영화 그 자체로서의 우주이며, 하나의 메타영화이다. 이미지와 운동의 동일성은 물질과 빛의 동일성에서 온다.---내재성의 평면 위에서의 빛의 확산 또는 증식에 대한 긍정. 운동-이미지에는 물체들이나 단단한 선들이 아니라 오직 빛의 선들 또는 형상들만이 존재한다. 공간-시간 블럭은 그런 형상들이다. 그것들은 이미지 자체다.--- 눈은 사물들 속에, 빛을 발하는 이미지들 그 자체 속에 있다. "사진술은 만약 사진술이 존재한다면, 사물들의 내부 바로 그 속에서 그리고 공간의 모든 점들엥 대해서 이미 스냅 촬영되었고 이미 찍혀져 있다."(<물질과 기억>, 29). 이것은 빛을 정신의 편에 위치시키고, 의식을 그들의 본래적인 어둠으로부터 사물들을 이끌어내는 하나의 광선으로 만드는 철학의 전통 자체와 단절하는 것이다. 의식은 일종의 '반투명한 사진'이며, 의식이 빛인 것이 아니라 이미지들의 세트 또는 빛이 물질에 내재적인 의식이다. 의식은 단지 그것이 없다면 빛이 항상 자신의 근원을 드러내지 않고 증식되는 불투명성일 따름이다.

2) 운동-이미지로부터 그 변종들로
* 평면의 어떤 지점에서든지 간격이 나타난다. 이것은 작용과 반작용 사이의 간극이다.이 간격현상은 물질의 평면이 시간을 포함하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닫힌 체계들, 그림들이 구성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여기다. 고립된 다른 것들은 바로 고립에 의해서 지각들이 된다. 플에임화. 살아있는 이미지에 의해 반사되는 이미지가 지각. 우리는 작용과 반작용 사이의 간극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두뇌는 다른 이미지들 중의 특별한 이미지를 구성하며, 그것은 이미지들의 중심없는 우주에서 불확정의 중심을 구성한다. 운동-이미지가 불확정의 중심과 관련될 때 그것은 지각-이미지가 된다. 이경우 우주는 만곡되고 하나의 지평을 형성한다.여기서 다시 불확정적인 중심의 연기된 반작용으로서의 행동이 나타난다. 지각은 간극의 한 면이고 행동은 그 다른 면이다. 우리는 인지할 수 없는 미세한 거리를 통해 지각에서 행동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이 양자 사이에 감정affection이 간극을 점령한다. 그것은 불확정적인 중심에서, 즉 주체 안에서, 교란적인 지각과 주저하는 행동 사이에서 물결친다.그것은 주체와 객체의 일치, 또는 주체가 스스로를 자각하는, 스스로 경험하거나 스스로 '안으로부터' 느끼는 방법이다. 이것이 운동-이미지의 마지막 화신인 감정-이미지이다. 이것들은 시간의 간접적인 이미지들이다.
* 롱쇼트=지각 이미지 / 미디엄쇼트=행동이미지 / 클로즈업=감정이미지--->지각적 몽타주 / 행동적 몽타주/감정적 몽타주
* 그에 반해 직접적인 시간-이미지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베르그송이 기억-이미지라고 부르는 것. 퍼스에 따르면 이미지가 기호들을 발생시키는 것은 명백하다.

5. <감각의 논리>

* 감각이란 쉬운 것,이미 되어진 것,상투적인 것의 반대일 뿐 아니라, 피상적으로 감각적인 것이나 자발적인 것과도 반대이다. 감각은 주체로 향한 면이 있고(신경시스템,생명의 움직임,본능,기질 등 자연주의와 세잔 사이의 공통적 어휘처럼), 대상으로 향한 면도 있다(사실,장소,사건). 차라리 감각은 전혀 어느 쪽도 아니거나 불가분하게 둘 다이다. 감각은 현상학자들이 말하듯이 세상에 잇음이다. 나는 감각 속에서 되어지고 동시에 무엇인가가 감각 속에서 일어난다. 결국은 동일한 신체가 감각을 주고 다시 그 감각을 받는다.이 신체는 동시에 대상이고 주체이다. 관객으로서 나,나는 그림 안에 들어감으로써만 감각을 느낀다.그럼으로써 느끼는 자와 느껴지는 자의 통일성에 접근한다. 인상주의자들을 뛰어넘은 세잔의 가르침은 바로 이것이다. 감각이란 빛과 색의 자유롭거나 대상을 떠난 유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신체 속에 있다.비록 그 신체가사과의 신체라할지라도 상관없다....그림 속에서 그려지는 것은 신체이다.그러나 신체는 대상으로서 재현된 것이 아니라,그런 감각을 느끼는 자로서 체험되어진 신체이다.....세잔의 세계는 자연의 세계이고 베이컨의 세계는 인공의 세계이다.....
* 세잔느가 말한 '감각의 논리' : 리듬과 감각 사이의 관계이고 그 관게에 따라 각각의 감각 속에는 그 감각이 통과하는 층리들과 영역들이 만들어진다.이 리듬이 어떤 음악을 주파하듯이 어떤 그림을 주파한다. 그것은 바로 심장의 팽창-수축이다. 세상은 내 위에 닫히면서 나를 사로잡고 나는 세상을 향해 열리고 또 세상을 열어젖힌다....시각적 감각 속에 살아있는 리듬.... 복수감각을 지닌 형상을 시각적으로 나타나게 해주는 ; 한 영역에 속하는 감각이(예:시각적 감각) 모든 감각영역에 걸쳐잇고 그들을 모두 다 통과하는 어떤 생생한 힘 위에서 직접 포착되엇을 때 가능 ; 이 힘은 시각이나 청각 등보다 훨씬 깊은 것으로서 리듬이라고 한다.
* 나는 형상으로 향하는 것이가. 형상에로의 길에 세잔은 감각이라고 하는 간단한 이름을 주었다. 형상은 감각에 기인한 느낄 수 있는 형태이다. 감각은 살의 시스템인 신경시스템 위에 직접작용한다. 추상적 형태는 두뇌의 중개에 의하여 움직이기 때문에 뼈에 훨씬 가깝다.물론 회화에서 이런 감각의 길을 개발한 사람이 세잔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세잔은 이 길에 전례없는 위상을 부여하였다.
* 선과 색에 의한, 필치와 얼룩에 의한 회화의 두 정의는 정확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하나는 시각적이고 다른 하나는 손적이기 때문이다. 눈과 손의 관계 그리고 그를 통해 이 관계가 통과하는 가치들을 특징짓기 위해 눈은 판단하고 손은 작업한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 충분치가 않다. 눈과 손의 관계는 훨씬 더 풍부하고 역동적인 긴장, 논리적인 뒤집기 기관적인 교환과 대리를 통과한다---(1) 손의 종속(코드적인 모습, 눈에 대한 손의 극대의 종속 ; 시각은 재적인 것이 되고 손은 손가락으로 축소, 시각은 이상적인 광학적 공간을 발전시키고 자신의 형들을 고아학적 코드에 맞게 포착하는 경향), 하지만 광학적 공간도 최소한 초기에는 그가 거기에 접속되어 있는 손적인 근거를 제시한다. 깊이,윤곽,명암에 의한 형뜨기 등이 여기에 속한다 (2) 손의 비종속(손적인 돌발흔적) ; 시각이 거의 뒤쫒을 수 없고 광학적인 것을 해체시켜버리는 형 없는 공간이고 쉴새 없는 움직임이다.쫏을 수. (3) 눈으로 만지기 ; 눈으로 만지는 한에서만 그린다(이집트 예술에서 꽉찬 의미,손적 격렬함과 비종속으로부터 출발한 현대적 눈 속에서 다시 창조될 수 잇다.
---얼룩-공식,터치-공식,색-공식,거리-공식 이런 새로운 거리 혹은 관계들로부터 구상적이지 않은 닮음이 나오게 된다....그러나 돌발흔적은 공간과 시간 속에서 국지화되어야 하고 전체 그림을 뒤덮어서는 안된다. 이렇게 되면 뒤죽박죽될 것이다. 돌발흔적은 그 자체가 대재난이면서도 대재난을 만들지는 말아야 한다...점진적으로 느닷없이 나온다...광학적 눈에서 손으로, 손으로부터 만지는 눈으로 도약하듯이----손으로부터 온 회화적 사실은 만지는 눈,눈의 만지는 시각, 이 새로운 명증성인 제3의 눈의 구성이다. 그것은 마치 촉지적인 것과 광학적인 이원성이 돌발흔적으로부터 온 눈으로 만지는 기능을 향해 극복되는 것과 같다.

* 각각의 예술과 작가에 따라 방법상의 차이가 많지만 크게 몇가지 감각구성의 기념비적 유형들이 있다 : (1) 단순한 감각을 특징짓는 진동이 있다 (2) 껴안음 혹은 몸과 몸의 어우러짐이다( 두 개의 감각들이 에너지들과 다를 바 없는 어우러짐 속에서 너무나 빈틈 없이 결합됨으로써 서로 서로의 안에서 울리는 경우) (3) 물러섬, 분할,이완 (이는 반대로 두 개의 감각들이 서로 떨어져 나가고 헐거워지는 경우다. 그러나 이는 너무 조밀하면서도 가볍기만 해서 간극이 벌어질 수록 모든 방향으로 펼쳐지면서, 더 이상 그 어떤 버팀대도 필요로 하지 않는 집적을 형성하는 이음쇠처럼, 오로지 감각들 사이로 혹은 그 안으로 파고 들어오는 빛, 공기, 공백을 통해 다시 합쳐지기 위해서이다)--감각을 진동시키기/감각을 결하하기/감각을 트이게 하거나 쪼개거나 비어내기.
* 지각은 인간이 부재하는 인간 이전의 풍경이다. 정서들이 자연의 비인간적인 풍경인 것처럼, 정서들은 이런 인간의 비인간적인 생성들이다.세잔이 말했듯이 '흘러가는 세상의 한 순간'일지라도 우리가 그 순간 자체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보존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세상 안에 있는 것이 아리나 세상과 더불어 생성되고 있다. 즉 세상을 관조함으로써 생성되는 것이다. 모든 것은 비전이며 생성이다. 우리는 우주가 되어간다. 즉 동물이며,식물이며 분자로 되어가고 제로로 되어간다. 더 이상 객체도 주체도 없이 오로지 그 자체만을 통하여 그런 삶, 순간의 지각들을 구성하는 비전. 자코메티는 "시간과 공간 속에 정지된 그런 비전들을 우리는 스타일이라고 부른다"고 말한다. 문제는 언제나 삶을, 그것을 가두어 놓은 곳으로부터 해방시키거나 불확실한 투쟁으로 이끌어가는 것이다.---정서의 경기, 생성의 경주 ; 예술가들이 철학자들처럼 대개가 손상되기 쉬운 병약한 건강상태를 지는 것은 지병이나 신경증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삶 속에서 그 누구라도 감당키 벅차며, 스스로에게도 엄청난, 그리고 그들에게 말없는 죽음의 표지를 달아주는 그 무언가를 보았기 때문이다.그러나 그 무엇이란 또한 체험의 병등을 꿰뚫고 그들을 살게끔 해주는 원천이며 숨결이며(니체가 건강이라고 부른 바로 그것)이기도 하다.---예술 고유의 건강성 ;
* 정서란 체험된 상태로부터 다른 상태로의 전이가 아니라 인간의 비인간적 생성이다. 유사함이 있으나 유사함은 아니다. 오히려 생산된 유사함이다. 차라리 유사함이라곤 없는 두 감각들의 어우러짐 속에서 혹은 반대로 단 한번의 반사로 그 둘 모두를 포착해내는 빛의 원격조정에서의 양극의 인접함이다.오직 삶만이 생물체들이 소용돌이치며 선회하는 그런 지대(구별되지 않는 지대)를 창조해내며,오직 예술만이 유일하게 자신의 공동-창조의 기획 속에서 거기에 도달하고 스며든다.
* 개념의 존재가 변주들이며 기능의 존재들이 변수들이듯 감각의 존재들은 다양성이다. 예술은 견해를 갖지 않는다. 예술은 지각작용들,감정들,견해들로 이루어진 삼중의 조직을 해ㅐ체시켜, 거기에 언어의 자리를 대신하는 지각들,정서들,감각의 집적들로 구성된 하나의 기념비를 들어앉힌다. 미학적 형상들은(그리고 그것을 창조하는 스타일은) 수사학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감각들, 다시말해 지각들과 정서들,풍경들과 표정들,비젼들과 생성들이다. 감각적 생성은 다른 무엇으로 생성되어가는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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