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 베르그송 형이상학의 미학적 의의에 관한 연구
- "직관"과 "지속"과 "정서"의 개념을 중심으로 -*1) 전 수 진**2)
머리말
서양 철학사에서 현대 프랑스 철학의 출발점으로 지적되는 이름은 다름아닌 앙리 베르그송(1859∼1941)이다. 실증주의와 결정론적 진화론이 우세했던 19세기 말의 지적 분위기에서 철학적 사유를 시작했던 그는 동시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실증과학의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실증과학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실재를 대상으로 새로운 형이상학을 구축했다.
그의 형이상학을 이루는 사상적 근간은 정신주의적 실재론(réalisme spiritualiste)이며, 이 정신주의적 실재론은 고대 그리스 형이상학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한 철학으로 이해되고 있다.1) 베르그송은 멘느 드 비랑, 펠릭스 라베송, 쥘르 라슐리에, 에밀 부트루 등의 정신주의적 실재론자들을 스승들로 하고 있으며, 이들은 고대 그리스로부터 시작한 학의 이념인 실증성(positivité)과 정확성(précision)을 이들의 형이상학의 방법론으로 하고 있다. 즉, 이들은 대상에 대한 모든 개별자료들을 통해 그 대상에 이르고자 하는 실증성과 대상을 그 부분이나 다른 것으로 환원하지 않고, 그 자체로 파악하고자 하는 정확성을 통하여 그 대상으로서의 정신(esprit)을 탐구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들이 추구하는 형이상학의 대상으로서의 정신 역시 고대 그리스적 정신관을 계승하고 있다. 즉, 이들에 의하면 정신이란 생명, 정신, 존재로 이어지는 존재자의 존재방식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필연적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물질과 대립되는 것이다. 이렇게 정신주의적 실재론자들은 고대 그리스 형이상학의 방법론과 정신관을 토대로 해서 근대 이후 발달한 생물학과 심리학의 성과를 수용하여 새로운 형이상학을 제시하고자 했다.
이러한 사상적 근간으로부터 출발한 베르그송은 그의 스승들과 마찬가지로 고대 그리스 형이상학의 이념을 계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당대의 수학, 물리학, 생물학, 심리학 등의 과학이론을 검토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서양철학의 흐름 전반을 반성하면서 형이상학적 실재를 새롭게 사유하고자 했다. 그의 전 저작에 걸친 사유의 여정은 "『의식의 직접적 자료에 관한 시론』(1889)에서 지속하는 자아의 자유를, 『물질과 기억』(1896)에서 뇌와 독립해서 존재하는 기억의 실재성과 영혼 불멸의 가능성을, 『창조적 진화』(1907)에서 우주에 충만해 있는 생명과 그 창조를, 그리고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1932)에서 최후로 신을"2) 사유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그 시야를 넓혀가고 있으며, 이를 통해 베르그송은 "정신과 정신적 질서의 복권"3)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사유의 여정을 통해 "영원의 상 아래서"(sub specie aeternitatis) 모든 것을 바라보는 과거의 형이상학과는 달리, "지속의 상 아래서"(sub specie durationis) 생성과 변화를 본래적 실재로 파악하는 새로운 역동적 형이상학을 구축하고 있으며4), 이 역동적 형이상학을 중심으로 해서 지속, 직관, 이마쥬, 리듬, 생명의 도약, 창조적 정서 등 그의 고유한 개념들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베르그송의 철학적 작업이 그의 생존시에서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예술활동과 그것을 해명하는 예술이론에 영향을 주고 있음은 매우 주목할만한 사실이다. 그의 철학적 개념들이 20세기 초반의 문학과 예술의 창작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며, 특히 프루스트, 페기, 끌로델, 발레리, 드뷔시 등이 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5) 마찬가지로 그 철학적 개념들이 개별 예술을 해명하는 미학이론들에 원용되어 왔다는 것 역시 주목할만한 사실이다. 개별 예술에 대한 베르그송의 저작으로는 『웃음』(1900)을 들 수 있는데, 이 저작은 생명성의 개념을 통해 희극의 의미를 해명하고 있다. 이러한 직접적인 저작을 제외하더라도 그의 철학적 개념들이 개별적인 예술이론에서 이론적 원천으로서 등장하는 것은 20세기 말인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출판된 몇 몇 단행본들만 해도 다양한 분야와 시각을 가지고 개별 예술을 해명하는 이론적 바탕으로서 베르그송의 철학을 활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우선 영화이론의 경우, G. 들뢰즈는 『영화 1 : 운동-이마쥬』(1983)와 『영화 2 : 시간-이마쥬』(1985)에서 베르그송의 이마쥬론을 연구의 주요한 방법론적 원천으로 삼아 영화적 개념들, 즉 이마쥬의 유형들과 그 유형들 각각에 상응하는 기호들을 분류하는 작업에 착수하고 있다. 문학이론의 경우에서도, P. 더글라스의 『베르그송, 엘리오트, 그리고 미국 문학』(1986)과 T. 쿼크의 『베르그송과 미국 문화』(1990) 등의 저작들이 20세기의 미국문학과 그에 깊은 영향을 끼친 베르그송의 철학적 개념들 간의 긴밀한 관계를 연구의 주제로 삼고 있다. 또한 미술이론의 분야에서는 M. 안틀리프가 『창의적 베르그송』(1993)에서 야수파와 입체파, 미래파 등의 현대 미술사조의 흐름 안에서 베르그송의 철학이 어떤 생산적인 역할을 수행하는지를 해명하는 작업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상과 같은 연구들은 베르그송의 철학적 개념들을 차용해서 특수한 예술현상들을 설명하는 것이며, 이러한 작업들은 베르그송의 철학 전체가 지니는 미학적 의의를 해명하는 것과는 다소 구분되는 작업이다. 따라서 이와는 달리 베르그송의 철학이 지니는 미학적 의의를 해명하는 작업과 관련된 저작들을 추려본다면, T. E. 흄의 『성찰』(1924)에 수록된 「베르그송의 예술 이론」과 A. 쟈스메리의 『베르그송의 미학 이론』(1937), 그리고 R. 바이에의 『미학의 방법에 관한 시론』(1953)에 수록된 「앙리 베르그송의 미학」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저작들이 가지는 공통적인 결함이 있다. 그것은 이들 이론들이 베르그송의 "직관"의 개념을 중심으로, 곧 인식이론을 중심으로 기술되어 있기 때문에 베르그송의 철학 전체가 지니는 미학적 의의를 해명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베르그송의 철학에서 체계적인 미학이론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그의 철학의 전 면모를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각을 요청하게 되며, 이러한 관점은 아마도 베르그송 스스로 원할 것인 바 형이상학이 될 것이다.
본 논문은 바로 이 점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 즉, 베르그송의 형이상학 자체가 미학적 이론으로서 읽혀질 수 있다는 입장에서 본 논문은 그의 철학을 미학적 이론으로 재구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연구자는 본 논문에서 베르그송이 전 저작에 걸쳐 전개하고 있는 형이상학을 기초로 하여 그의 주요한 철학적 개념들의 미학적 의미를 해명해보겠다. 여기에서 베르그송의 철학에 대한 들뢰즈의 독해방식이6) 본 논문의 구성을 이루는데 도움이 되었음을 밝혀둔다. 연구자는 들뢰즈의 시각을 차용해서 베르그송의 형이상학을 보여줄 수 있는 기본적인 구도를 그려낸 다음, 그 미학적 이론의 의의를 보완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러한 방식에 따라 연구자는 본 논문의 Ⅰ장에서는 형이상학의 방법인 직관(intuition)의 개념을 중심으로 그 미학적 의미를 해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다음 Ⅱ장에서는 직관의 대상이자 형이상학적 실재인 지속(durée)의 개념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함으로써 어떻게 지속이 미적 실재로서의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를 해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마지막 Ⅲ장에서는 지속과 창조, 창조와 정서(émotion), 정서와 직관의 개념들 간의 관계를 설정하고 고찰해봄으로써 베르그송이 바라보는 형이상학과 예술의 관계를 해명하고자 한다.
I.형이상학의 방법으로서의 미적 직관
베르그송의 형이상학은 그 방법으로서의 직관, 그 대상으로서의 지속, 그리고 지속의 분화 운동으로서의 생명의 도약 등의 개념들을 주요한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에 대해 들뢰즈는 직관의 방법에 의해 지속, 기억, 생명의 도약 등의 개념들의 관계가 규정되기 때문에 직관에 대한 논의가 맨 앞에 위치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7) 따라서 이 Ⅰ장에서 연구자는 베르그송이 형이상학의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는 직관에 대해 고찰하고, 그 미학적 의미를 해명하고자 한다. 연구자는 방법론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하는 저작인 『사유와 운동자』를 통하여 직관과 지성을 비교함으로써 직관의 특성을 밝혀보겠다. 이와 아울러 베르그송의 저작들 안에서 그 대상의 폭을 넓혀가는 직관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직관과 지각, 기억, 지성, 본능과 같은 개념들과의 관계를 고찰하고자 한다. 그리고 나서 직관의 미적 의미를 해명할 것이다.
1. 형이상학의 방법과 과학의 방법 : 직관과 지성의 비교
베르그송은 『사유와 운동자』에서,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그가 철학자에게 추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방법에 대해 다루고 있다. 우선 베르그송은 첫번째 서론의 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철학에 가장 결핍되었던 것은 정확성이다. 철학의 체계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실재(réalité)의 치수에 맞게 재단되지 않았다. 이 체계들은 실재에 비하여 너무 헐렁하다."8) 이렇게 기존의 철학 체계들을 블만족스러운 것으로 보고 있는 베르그송은 "그 대상에 꼭 들어맞는 설명, 즉 대상과의 사이에 조금의 틈새도 지니지 않는 설명"9)에 대한 기대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기대에서 시작한 탐구의 여정은, 첫번째 서론의 말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출발하고 있다. "먼저 이미 만들어진 개념들을 제쳐놓고, 실재적인 것을 직접적으로 주시하고, 이 실재를 그 마디들(articulations)을 고려하면서 세분한다면, 표현을 위해 형성되어야만 하는 새로운 개념들은 이번에는 대상의 치수에 꼭맞게 재단될 것이다."10)
이렇게 실재에 대한 정확성을 담지한 철학을 베르그송은 두번째 서론에서 '직관적 형이상학'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실재의 파동들을 따라가는 직관적 형이상학 . . 은, 단 한번에 사태의 총체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각 사태에 대하여 정확하고 유일하게 꼭 들어맞는 설명을 하는 것이다."11) 여기에서 직관은 실재에 대한 정확성을 이끌어내는 인식의 양태, 즉 형이상학의 방법을 가리킨다.
이제 형이상학의 방법인 직관의 특성을 과학의 방법인 지성과의 대조를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베르그송에 따르면, 지성은 감각기능(sens)의 연장이며, 그 역할은 도구를 제작하고, 신체의 행위를 주위물체에로 인도하는 것이다.12) 이와는 반대로 형이상학은 그 고유한 영역으로서 정신을 확보하며, 이 영역에서 새로운 사유기능, 즉 직관을 발휘하고자 한다. 이러한 직관은 무엇보다도 내적 지속을 대상으로 한다. 직관은 "병치가 아닌 계속를, 내면을 통한 성장을, 미래에 겹쳐지는 현재 안에서 끊임없이 연장하는 과거를 파악한다."13) 따라서 직관의 근본적인 의미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겠다. 즉, 직관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지속 안에서 사유한다"14)(penser en durée)는 것이다.
지성은 인간적 사유방식으로서 정신이 물질에 기울이는 주의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은 정신 자신을 사유할 때 반드시 물질과의 접촉에서 물들었던 습관들, 즉 지적 경향성의 비탈길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15) 이와 같이 직관적으로 철학한다는 것은 사유작업의 습관적 방향을 역전시키는 것이다.16)
베르그송에게 형이상학은 오직 사유의 작업에 자연적으로 나있는 비탈길을 거슬러 올라가서 그 즉시 연구되고 있는 사물 안으로 정신의 팽창을 통하여 들어가려는 노력이다.17) 결론적으로 베르그송에게 형이상학의 방법인 직관은 과학의 방법인 지성의 습관적 방향을 역전시킬 때 획득되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직관의 모습은 다음 2절에서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2. 직관의 등장과 다양한 측면들
1절에서 살펴본 것처럼, 형이상학의 방법으로서 제시된 직관의 근본적인 의미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즉, 직관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지속 안에서 사유한다는 것이다.18) 이렇게 "지속 안에서"의 "정신에 대한 정신의 직접적 봄"19)이라는 단순한 행위로서 표현되는 직관은 그것이 현실화되는 여러 방향을 배제하지 않는다.20) 따라서 직관은 베르그송의 저작들에서 다양한 기능과 측면을 지닌 것으로서 드러나고 있으며, 이 2절에서 그 다양한 모습들이 차례로 설명될 것이다.
이러한 직관의 다양한 측면들은 베르그송의 저작들 안에서 다음과 같이 대상의 영역을 확대해가면서 드러나고 있다. 즉, 『의식의 직접적 자료』(1889)에서 주관적인 의식의 지속을 대상으로 하여 등장하기 시작한 직관은 『물질과 기억』(1896)에서는 그 대상을 객관적인 물질성에로까지 확대하여 정신성과 물질성의 교차를 대상으로 하는 직관으로 변모하고, 다시 『창조적 진화』(1907)에서는 생명의 본질을 대상으로 하는 직관으로 그 대상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이렇게 일종의 진화단계를 거치는 직관은 『사유와 운동자』의 두번째 서론(1922)에서 비로소 형이상학의 방법으로 명백하게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1) 지속의 발견과 직접적 직관의 등장
베르그송은 그의 첫번째 저작 『의식의 직접적 자료에 관한 시론』에서 직접적인 내성(introspection)을 수행함으로써 실재적인 지속을 파악하고자 시도하고 있다.21) 그는 여기에서 형이상학과 심리학에 공통되는 문제인 자유의 문제를 택하고 있다.22) 그에 따르면, 심리상태를 서로 분리시켜 분명히 구별되는 단위들로서 관찰해보면, 그것들은 다소 강도를 갖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것들을 다양성의 면에서 관찰해보면, 시간 속에 전개되어 지속을 형성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것들 상호간의 관계에서, 어떤 하나의 단위가 다양성을 통해 보존되어 있다고 생각할 때 그것들은 서로 결정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따라서 베르그송은 강도, 지속, 자발적 결정의 세 관념을 감각세계로부터의 침입, 말하자면 공간관념의 집요함에서 해방시킴으로써 정화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23)
이와 같은 시도를 수행하면서 베르그송은 우리 내면의 지속을 발견한다. 즉, 우리 의식의 내면은 서로 구별되지 않고 계속되는 여러 상태인 것이다.24) 이와 같이 내면의 지속은 원초적인 순수한 상태에서 완전히 질적인 다양성으로 서로 속에 용해되는, 여러 요소들의 절대적인 이질성으로 나타난다.25) 이러한 우리 내면의 지속은 실재적 지속으로서, 공간성을 배제한 실재적 시간이다. 의식의 흐름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내면의 지속은 질의 다양성, 진행의 연속성, 방향의 단일성을 지닌다.26) 그리고 이러한 실재적 지속이 파악되는 것은 바로 직접적 직관에 의해서이다.27)
이렇게 해서 직관은 실재적 지속, 즉 내적 지속의 발견 이후 그에 따라 요청되는 방법으로서 등장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베르그송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는 대목이 있다. "형이상학이 직관을 통해서 진행되어야 하며, 직관은 지속의 운동성을 그 대상으로 삼고 있고, 지속은 본질상 심리적이라고 한다면, 이때 우리는 철학자를 오직 자기 성찰 안에 가두어 두는 것이 아닐까? 철학이란 졸고 있는 목동이 흐르는 물을 보듯이 단순하게 자신의 삶을 응시하는 것이 되어버리지 않을까?"28) 베르그송의 이러한 문제의식은 사실 직관의 대상인 지속에 대하여 객관성의 의미를 획득하고자 하는 것이며, 이러한 의미는 『물질과 기억』 그리고 『창조적 진화』에서 본격적으로 탐구되고 있다. 이에 대한 베르그송의 언급을 들어보자. 『물질과 기억』에서는 "물질적인 사물의 객관성이 우리들이 갖는 지각에 - 만일 그러한 지각을 그 원래의 상태에서 그리고 그 직접적인 형태 하에서 우리가 취한다면 - 내재한다"29)는 것을, 그리고 『창조적 진화』에서는 "직접적인 직관이 물질의 본질은 물론 생명의 본질을 파악한다."30)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상으로 연구자는 베르그송의 철학에서 직관이 어떻게 등장하는지를 살펴보았으며, 다음 (2)에서는 그의 두번재 저작에서 이 직관의 대상과 기능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고찰해보겠다.
(2) 지각·기억의 관계 안에서의 직관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은 「육체와 정신의 관계에 대한 시론」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으며, 이 저작의 연구의도는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혀지고 있다. "이 저작은 정신의 실재와 물질의 실재를 단언하며, 그 둘의 관계를 기억이라는 명확한 예에 의거하여 규정하고자 시도한다."31) 여기에서 회상(souvenir)으로서의 기억은 다름아닌 정신과 물질의 교차점을 가리킨다.32)
위와 같은 시도의 결과들은 지각과 기억의 문제들로 정리될 수 있다. 우선 지각의 경우, 나의 지각 안에 대상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들 안에 나의 지각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각은 사물들 안에 위치하며, 대뇌의 상태는 지각에 정확히 상응한다.33) 그리고 의식적인 지각은 다음과 같은 조건을 가지게 된다. 즉, 회상으로 물들지 않은 의식적 지각은 없다. 다시 말해서 지각이 아무리 짧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은 항상 어떤 지속을 차지하며, 따라서 다수의 순간들을 서로의 안으로 연장시키는 기억의 노력을 요구한다.34) 결론적으로 순수기억으로서의 정신과 순수지각으로서의 물질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다. 즉, "정신은 물질로부터 지각들을 빌어와 그것들에서 자신의 영양분을 끌어내고, 물질에게 지각들을 운동의 형태로 주며 거기에서 자신의 자유를 각인한다."35)
여기에서 순수기억으로서의 정신과 순수지각으로서의 물질이 만나는 지점이 회상이며, 이 회상이 바로 직관의 대상이다. 즉, "우리는 직접적인 직관 안에서 대상의 실재와 접하는 것이다.36) 여기에서 이러한 직접적인 직관에 주어지는 실재적인 것은 "가분적인 연장체와 순수한 비연장체 사이의 어떤 중간적인 것"37)으로서 바로 정신과 물질이 만나는 지점인 회상인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실재적인 직관의 역할은 회상을 불러오고, 회상에 몸체를 부여하고, 회상을 활동적으로 만들어 현실화하는 것이다."38) 또한 이와 같은 논의 속에서 직관은 기억의 작용과 지각의 작용 간의 관계 안에서 등장한다. "실제적으로는 지각과 분리될 수 없는 기억은 과거를 현재에로 삽입시키고, 또한 지속의 다양한 순간들을 유일한 직관 속으로 수축시킨다."39) 또한 "기억은 우리로 하여금 유일한 직관 안에서 지속의 다양한 순간들을 파악하도록 하면서, 사물이 흘러가는 운동, 즉 필연성의 리듬으로부터 우리를 빼낸다."40)
여기에서 베르그송이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으나, 기억과 직관은 동일한 원천, 즉 정신성에서 함께 비롯하는 것으로 암시되고 있다.41) 그리고 이와 같이 순수기억으로서의 정신성에서 비롯하는 직관은 더 이상 물질에 대한 행위에로 정위되지 않는 지각, 즉 정신성에 의해 물질성으로부터 벗어난 확장된 지각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3) 지성·본능의 관계 안에서의 직관
이상과 같이 주관적 의식의 지속에서 정신성과 물질성의 교차에로 그 대상 영역을 넓힌 작관은 이제 생명의 본질을 파악하는 방법으로까지 확대된다. 이에 대한 언급은 『창조적 진화』의 제2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서 베르그송은 먼저 직관의 기원으로서 지성과 본능을 서로 대비해가며 설명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생물체의 인식작용의 두가지 주요 경향들은 지성(intelligence)과 본능(instinct)이다. 본능은 사물들에 기초하며, 지성은 그 관계들에 기초한다. 즉, 지성은 형상에 대한 인식이며, 본능은 질료에 대한 인식이다. 또한 본능은 인식의 외연성에 기초하고, 지성은 인식의 내포성에 기초한다. 본능과 지성, 이 두 가지 경향은 성장과 함께 상호분리한다.42) 이러한 지성과 본능은 처음에는 서로 얽혀있던 것으로서 아직까지도 그 공통의 기원을 보유하고 있다. 즉, 지성으로서 본능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 것이 없고, 본능으로서 지성에 둘러싸이지 않은 것이 없다. 이 양자가 상호수반되는 것은 상호보완하기 때문이고 상호보완하는 것은 서로 상이하기 때문이다. 본능 속에 있는 본능적인 것은, 지성 속에 있는 지성적인 것과 반대의 방향에 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경향들이며, 완성된 것이 아니다.43)
이제 생명에 대한 지성과 본능의 관계를 살펴보자. 베르그송에 따르면, 지성은 생명에 대한 몰이해로 특징지워지는 반면, 본능은 생명의 형태로 주조되었다. 즉, 지성이 모든 사태를 기계적으로 다루는 반면, 본능은 모든 사태를 유기적으로 처리하는 것이다.44) 이러한 본능은 지성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정신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은 아니다. 감정의 현상에서나, 반성되지 않은 공감과 반감의 현상에서 우리는 본능과 비슷한 무엇을 지성이 침투된 모호한 형태로 경험한다. 이와 같은 경험은 내부로부터의 직관에 의한 것이며, 이 직관은 표상된 것이기보다는 체험된 것으로서 예언적(divinatrice) 공감이라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45)
결론적으로 베르그송의 철학에서 직관은 지성과 본능의 상호관계 안에서 비롯한다고 할 수 있겠다. 즉, 직관이란 무관심적(désintéressé)으로 되어, 자기 자신에 대해 의식적이고, 대상에 대하여 반성할 수 있고, 그것을 무한히 확장해갈 수 있는 본능이며, 이것은 우리를 생명의 내부에로 인도한다. 그러나 한가지 밝혀두어야 할 점은 직관이 지성을 능가하지만, 직관을 그 위치에로 올린 추진력은 지성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이다. 즉, 지성이 없다면, 직관은 본능으로 머물러 있을 것이라고 베르그송은 밝히고 있다.46)
3. 직관의 미적 의미
베르그송은 「형이상학 입문」에서 형이상학적 직관을 설명하기 위하여 문학작품의 창작을 예로 들고 있다. 베르그송의 예술작품을 통한 이러한 예시와 비유는, 지속에 대한 직관이 예술작품의 창작과 예술작품에 대한 해석에서 가장 잘 드러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 절에서는 앞서 살펴본 직관이 지닌 미학적 의미를 밝히고자 한다. 그 의미는 첫째 행위를 위한 지각이 팽창된, 지각을 위한 지각, 즉 실용적인 관심에 초연한(détaché) 지각이라는 것과, 둘째 지성의 추진력으로 인해 무관심적으로 진화한 본능이라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겠다. 그리고 이 두 가지 개념은 지성과 직관의 관계를 축으로 해서 동일한 것으로서 결론지어질 것이다.
(1) 초연한 지각으로서의 직관
먼저 베르그송의 논문 「변화에 대한 지각」을 통해 직관이 일상적인 작용으로부터 확장된, 즉 초연한 지각이라는 것을 해명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베르그송은 다음과 같이 제안하고 있다. 즉, 우리는 사물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뛰어넘는 대신, 지각에 몰두하여 지각을 파고들고 넓혀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의지를 끼워넣어 그 의지가 팽창하여 사물들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팽창시켜야 한다. 그렇다면, 감각과 의식은 자연적으로 제공해주는 것 이상을 줄 것이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예술가는 정확히 보는 것과 아울러 우리로 하여금 자연적으로 지각할 수 없는 것을 보게끔 하는 기능을 가지는 사람들이다.47) 그렇다면 예술은 지각기능의 확장이 가능함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것이다. 이것은 예술가들이 우리들보다 실제적이고 물질적인 삶의 측면에 덜 열중하기 때문이다.48) 예술가들의 경우, 그들은 지각하기 위해 지각한다. 그것은 오직 즐거움(plaisir)을 위해서이다. 그들은 초연하게 태어난다. 그리고 그 초연이 감각의 초연인가 아니면 의식의 초연인가에 따라, 그들은 각각 화가가 되고, 조각가가 되며, 음악가가 되고, 시인이 된다.49)
베르그송에 따르면, 이렇게 변화와 지속을 그 원초적 운동성 속에서 파악하는 것, 즉 지각기능의 확장과 활성화를 통해서, 특권적 영혼이 직관에 부여하는 연장을 통해서 우리의 앎의 총체에 연속성을 복원하게 될 것이다.50) 그의 말을 들어보자. "직관에 이르기 위해서 감각과 의식의 영역 밖으로 옮겨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지각을 그 근원에로 돌려보내자. . 모든 사물을 지속의 상하에서(sub specie durationis) 보는데 익숙해지자. 그 즉시 우리의 지각은 전기오르듯 활기를 띄며, 이 지각 속에서는 정돈되어 있던 것이 이완되고, 졸고 있던 것이 잠을 깨며, 죽어 있던 것이 생명을 찾게 된다."51) 이것은 "예술이 천성과 행운의 특권을 받은 사람에게만 그것도 아주 드물게 부여하는 만족감"52)이다. 이상과 같은 베르그송의 논의에 따라 직관은 예술가가 지니는 초연한 지각으로서 그 미학적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2) 무관심적 공감으로서의 직관
앞서 2절에서 『창조적 진화』를 다룬 대목에서 직관이란 지성이 제공하는 추진력을 통하여, 무관심적으로 된 본능이라는 것을 밝혀졌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이 직관은 바로 인간의 미적 능력에 의해 드러난다. 예술가는 공감에 의해 대상의 내부에 자리잡고, 직관의 노력으로 그와 모델사이의 공간의 벽을 낮춘다. 이러한 미적 직관은 그 공감적 상호소통에 따라, 생명 고유의 영역 - 상호침투와 무한히 연속적인 창조의 영역 - 에로 우리를 인도한다.53)
그런데 직관은 (1)에서는 지각을 위한 지각, 즉 초연한 지각으로, (2)에서는 지성이 개입되어 진화한 무관심적 본능으로 해명되었다. 그렇다면 이 양자의 관계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이상과 같은 미적 직관의 두가지 의미, 다시 말해서 초연한 지각과 무관심적 공감 간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유추할 수 있겠다. 즉, 우리의 지각은 우선적으로는 지성이 개입하는 것으로서 행위를 위한 선택의 결과이다.54) 그런데 이러한 실용적 지각이 의지의 힘을 입어 초연한 지각, 즉 직관으로 확장되는 것은 본능이 지성의 추진력에 의하여 무관심적 공감, 즉 직관으로 변모하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제 논문「윌리엄 제임스의 프래그머티즘 - 진리와 실재」에서의 베르그송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이 장을 마무리해보자. "실재 안에 가장 깊숙히 뿌리를 내리는 것은 감각 그대로를 번역하는 진리들이 아니라, 감정(sentiment)의 진리들이다. . . 실재는 하나의 전체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다원적이고 동적인, 상호 교차하는 흐름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이 흐름들 중의 하나에 접촉함으로써 발생하는 진리 - 이해되기 전에 느껴지는 진리 - 는 단순히 사유되는 진리보다 더 잘 실재 자체를 파악하고 축적할 수 있다."55)
Ⅱ. 형이상학의 대상으로서의 미적 지속
Ⅰ장에서 연구자는 베르그송이 형이상학의 방법으로서 제시한 직관의 미적 의미를 밝히고자 했다. 그렇다면 이 Ⅱ장에서는 베르그송이 형이상학의 대상, 즉 직관의 대상으로서 제시한 지속에 대하여 살펴보고, 이러한 지속의 개념이 어떻게 미적 실재로서의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지를 해명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우선은 베르그송의 형이상학의 내용을 이루는 지속의 개념이 그의 저작들에서 어떻게 전개되는지 고찰하겠다. 즉, 베르그송의 지속의 개념은 『의식의 직접적 자료에 관한 시론』에서는 연속적 다양성을 지니는 내면적 지속을 중심으로, 『물질과 기억』에서는 이마쥬들이 공존하는 기억으로서의 지속을 중심으로, 그리고 이후의 저작들 - 『물질과 기억』, 『창조적 진화』, 『지속과 동시성』 - 에서는 각기 리듬을 지니는 여러 지속들을 중심으로 설명되고 있다. 이러한 설명에서부터 베르그송의 독특한 개념들인 이마쥬와 리듬이 등장하는데, 이 개념들이 지니는 미학적 함의가 주목될 만하다. 따라서 연구자는 형이상학적 실재인 지속이 이마쥬와 리듬을 통해 미적 실재로서의 의미를 획득할 수 있음을 보이고자 한다.
1. 형이상학적 실재로서의 지속의 다양한 측면들
이미 Ⅰ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직관은 지속 안에서 실재를 파악하는 것이다. 베르그송에게 실재는 경향이며,56) 이러한 경향으로서의 실재, 즉 정신성과 물질성은 지속의 연속성에서 두 극한을 이룬다. 베르그송의 말을 들어보자. "직관은 우리로 하여금 지속의 연속성 전체와 접촉하게 하며, 우리는 이 연속성을 아래로든지 위로든지 따라가도록 해야만 한다. 이 두 가지 경우에서 우리는 점점 더 강렬해지는 노력을 통해 무한히 우리를 팽창해갈 수 있으며, 우리 자신을 초월한다. 전자의 경우, 우리는 점점 더 분산되는 지속에로 나아간다. 이 지속의 박동들은 우리의 것보다 빨라서 우리의 단순한 감각을 분할하여 질을 양으로 희석시킨다. 그 극한에는 순수한 동질성, 즉 우리가 물질성을 정의하는 순수한 반복이 있을 것이다. 또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우리는 점점 더 긴장되고, 압축되고, 강도가 깊어지는 지속에로 나아간다. 그 극한에는 영원성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개념적인 영원성, 즉 아무런 생기없는 영원성이 아니라, 생명의 영원성이다. 이 살아있는 영원성, 따라서 여전히 움직이는 영원성 안에서 우리의 지속은 빛 가운데 진동들처럼 우리에게 다시 나타난다. 이러한 영원성은, 물질성이 지속의 분산(éparpillement)이듯이, 전체 지속의 응결(concrétion)이다. 이 두 극한 사이를 직관이 움직이고 있으며, 이 운동이 형이상학 자체이다."57)
이 1절에서 연구자는 형이상학의 내용을 이루는 지속의 이론이 베르그송의 저작 안에서 한 개인의 의식의 지속에서부터 전 우주의 지속에까지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살펴보겠다. 지속에 있어서 "베르그송은 그의 처음 작품에서 마지막 작품까지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진화해갔다. . . 베르그송에게 지속은 심리적 경험에로 덜 환원되는 것처럼 보였다."58)
(1) 연속적 다양성으로서의 지속
베르그송은 직접적 직관을 통해서 파악하는 실재로서 지속하는 우리의 자아를 우선적으로 들고 있다.59) 그는 지속하는 자아로서의 의식 상태를 『의식의 직접적 자료에 관한 시론』의 제2장에서 두 종류의 다양성을 구별하면서 설명하고 있다.". . . 두 종류의 다양성이 있다. 하나는 물질적 대상의 다양성으로 직접적으로 수를 형성한다. 또 하나는 의식의 사실들의 다양성으로 이것은 필연적으로 공간이 개입하는 어떤 부호적 표상의 중개 없이는 수의 양상을 취할 수 없는 것이다."60) 여기에서 후자의 다양성이 바로 지속하는 자아가 지니는 다양성이며, 들뢰즈가 말하는 대로 연속적 다양성이다.61)
그런데 여기에서 연구자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베르그송이 이러한 연속적 다양성으로서의 순수한 지속을 멜로디(mélodie)에 비유하고 있는 대목들이다.62) 그는 참된 지속을 구성하는 불가분적인 변화의 연속성을 가장 순수한 계속의 인상, 즉 멜로디가 주는 인상을 통해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63) 이러한 베르그송의 설명 방식은 Ⅰ장에서 해명된 직관의 미적 의미와 마찬가지로 지속의 미적 의미를 보여주는 단초가 아닐까 한다. 다시 말해서 베르그송이 형이상학의 방법으로서 제시한 직관이 초연한 지각, 무관심적 공감으로서 미적 직관으로서의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 내면의 지속이 멜로디에 비유된 것은 지속이 기존의 개념으로는 파악되기 힘든 미적 방식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지속이 미적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에 대한 설명은 다음 (2)와 (3)에서 더 심화될 것이다.
(2) 이마쥬의 잠재적 존속으로서의 지속
앞서 (1)에서 우리 내면의 지속을 파악함에 있어서 그 다양성들의 연속에 주목해 보았다면, 이 (2)에서 연구자는 우리의 지속이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의 의식의 총화, 즉 기억이라는 것에 주목해서 기억으로서의 지속에 관해 살펴보겠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우리 내면의 지속은 "현재 안에서 과거를 연장하는 기억의 연속적 삶이다."64) 이러한 지속으로서의 기억이 주요한 문제로 다루어지는 것은 베르그송의 두번째 저작 『물질과 기억』에서이다. 이 저작에 따르면, 기억은 뇌, 곧 육체에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보존된다. "과거는 자신을 자동적으로 보존한다."65) 그 자체로 보존되는 회상으로서의 기억은 우리의 현재와 과거를 다음과 같이 관계지운다. "우리의 과거는. . . 현재의 감각 속으로 끼어들면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66) 즉, 과거에 대한 회상은 현재의 지각에 작용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강조할 만한 점은 회상과 지각의 동시간성이다. "회상의 형성은 결코 지각의 형성 뒤에 오지 않는다. 즉, 그 둘의 형성은 동시간적이다."67) 그리고 지각과 회상의 이러한 동시간성은 바로 과거와 현재의 공존을 의미한다.68)
베르그송은 이러한 기억의 작용을 서로 구분되면서도 사실상 분리되지 않는 세 항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 셰 가지 항은 순수 회상, 회상-이마쥬(souvenir-image), 지각이다. "지각은 결코 정신과 현재의 대상과의 단순한 접촉이 아니다. 지각에는 그것을 해석하면서 완성시키는 회상-이마쥬가 전적으로 배어 있다. 이마쥬-회상은 자신이 물질화하기 시작하는 순수 회상의 성질을 지니면서, 자신이 구현되고자 하는 곳인 지각의 성질을 지닌다. . . 마지막으로 권리상으로는 의심할 여지 없이 독립적인 순수회상은 이것을 드러내는 컬러풀하고(colorée) 생기가 감도는 이마쥬 안에서만 정상적으로 표명된다.69) 다시 말해서 현재의 지각과 맞닿아있는 회상, 즉 기억은 이마쥬에 의해서만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베르그송은 기억을 드러내는 이마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즉, "이마쥬의 형태하에 과거를 떠올리기 위해선 현재의 행위로부터 초연할 수 있어야 하며, 유용하지 않은 것을 중시할 줄 알아야 하고, 꿈꾸고자 해야 한다."70) 여기에서 연구자는 베르그송의 이러한 언급에서 이마쥬가 기억으로서의 지속이 드러나는 미적 방식으로서 그 의의를 지닐 수 있음이 암시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3) 각기 리듬을 지니는 여러 지속들
앞서 (1)과 (2)에서 논의된 지속은 우리 의식의 지속, 그리고 기억으로서의 지속이었다. 이제 (3)에서 연구자는 한 개인의 의식과 기억으로서의 지속 뿐만이 아니라 사물들의 지속, 더 나아가 우주의 지속에까지 이르는 베르그송의 지속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겠다.
베르그송은 이미 『물질과 기억』에서 "우리의 의식을 특징지우는 지속의 특수한 리듬"71)에 대한 언급과 함께 지속의 리듬들이 여럿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실재적으로 지속의 유일한 리듬은 없다. . . 그럼으로써 존재들의 일련 안에서 각자의 위치들을 정할 것이다."72) 그에 따르면 각각의 지속은 절대적이고 각각의 리듬 그 자체는 지속이다.73) 그러므로 우리의 지속은 무수히 많은 지속들 중의 한 지속일 뿐이다.74) 베르그송은 여러 지속들과 그 중의 하나인 우리 자신의 지속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직관의 노력을 통해서 지속 안에 위치해보자. 우리는 뚜렷이 확정된 어떤 긴장을 느끼게 될 것인데, 이 긴장의 확정 자체는 무수히 많은 가능한 지속들 가운데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75)
그렇다면, 이러한 무수한 지속들 가운데 우리 내면의 지속과 또한 외부의 사물들의 지속들, 그리고 모든 것을 아우르는 전 우주의 지속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한 설명으로는 『지속과 동시성』의 다음 구절을 들 수 있겠다. "우리는 어떻게 내적인 시간들로부터 사물들의 시간에로 이행하는가? 우리는 세계를 물질적으로 지각하고, 이러한 지각은 옳건 그르건 간에 우리 안의 그리고 동시에 우리 밖의 존재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한편으로 이 지각은 의식의 상태다. 또 다른 한편으로 이 지각은 느끼는 것과 느껴지는 것이 일치하는 물질의 피상적 막(pellicule)이다. 이와 같이 우리 신체와 주위의 모든 물질 - 우리 신체와 동시적인 - 의 순간은 우리의 내적 삶의 각 순간에 상응한다. 즉, 이러한 물질은 우리 의식의 지속에 참여하는 것처럼 보인다. 점차적으로 우리는 이러한 지속을 물질 세계의 전체에로 확장시키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이러한 지속을 우리 신체의 직접적인 부근에 한정시킬 어떠한 이유도 감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주는 우리에게 오로지 유일한 전체만을 형성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만일 그 일부분이 우리 주위에서 우리의 방식대로 지속한다면, 이것은 그 일부분 자체를 둘러싸는 일부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야 하고, 다시금 이런식으로 무한하게 진행된다. 이렇게 해서 우주의 지속이라고 하는 관념이, 말하자면 모든 개인적인 의식들 간의, 또한 이 의식들과 자연의 나머지 간의 연결선이 될 보편적 의식의 관념이 생겨난다."76) 그런데 이상과 같은 설명방식은 우주의 보편적 지속을 형이상학적 실재로서 보장하기에는 조금 미흡한 점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Ⅲ장에서 살펴볼 것처럼 베르그송의 형이상학은 진화론에 대한 독창적인 사유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즉, 그는 다윈이나 라마르크의 기계론적 진화론을 여러 실험결과들의 반증사례를 통해 반박하면서 자신의 독창적인 창조론적 진화론을 전개하고 있다.77) 연구자의 견해로는 이 창조론적 진화론을 이끌어나가는 "생명의 단일성"78)에 대한 관념이 바로 우주적 지속, 즉 보편적 지속에 대한 관념을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우주의 지속과 이 지속하는 우주가 지니는 리듬에 대하여 베르그송은 『창조적 진화』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주는 지속한다. 우리가 시간의 본성을 더 깊이 탐구할수록, 우리는 지속이 발명, 형태의 창조, 절대적으로 새로운 것의 연속적인 생성을 의미한다는 것을 더 이해하게 될 것이다. 과학에 의하여 제한된 체계들은 바로 우주의 나머지와 불가분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만 지속하는 것이다. . . 우주 안에서 두 가지 상반된 운동, 즉 하강 운동과 상승 운동을 구별해야 한다. 전자의 운동은 완전히 준비된 두루마리를 펼치는 것일 뿐이다. 원칙적으로 그것은 풀어지는 태엽에서처럼 거의 순간적인 방식으로 성취된다. 그러나 성숙과 창조의 내적 작업에 상응하는, 후자의 운동은 본질적으로 지속하며, 자기의 리듬을 전자에 부여한다."79) 따라서 사물들의 개별적인 지속은 그 자체로 지속한다기보다도 우주의 전체와 관련해서 지속하는 것이다.80) 그러므로 각기 리듬을 지니는 여러 지속들에 대한 논의는 제한된 다원론을 이룬다고 할 수 있겠다.81)
결론적으로 제한된 다원론으로서의 지속들의 논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즉, 전우주의 지속에 참여하는 지속들은 동시적이라는 것과 그 동시성(simultanéité) 안에서 지속들은 각기 리듬을 지니면서 다른 리듬에 부딪치고 본성상 다른 지속들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82) 연구자는 이와 같이 지속이 리듬을 통해 표현됨으로써 리듬은 지속이 드러나는 미적 방식으로 부각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2. 지속이 나타나는 미적 방식 : 이마쥬와 리듬
이 2절에서 연구자는 형이상학적 실재인 지속이 이마쥬와 리듬을 통해 미적 실재로서의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이고자 한다. 이 이마쥬와 리듬은 Ⅱ장 1절에서 본 것처럼 이마쥬의 공존으로서의 지속과 각기 리듬을 지니는 여러 지속들에 대한 논의를 통해 지속이 드러나는 방식으로 등장하며, 또한 초연하고 무관심적인 직관의 대상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이마쥬가 지속의 횡단면으로서 이해된다면,83) 리듬은 지속의 종적 측면으로서 이해될 수 있겠다.
(1) 이마쥬의 미적 의미
이미 1절의 (2)에서 고찰한 것처럼, 베르그송은 『물질과 기억』에서 지각의 대상으로서 이마쥬를 제시하고 있다. 또한 이 이마쥬는 지속으로서의 기억 안에 존속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하여 베르그송은 다음과 같은 조건을 통해 이마쥬가 지속을 드러내는 미적 방식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마쥬의 형태하에 과거를 떠올리기 위해선 현재의 행위로부터 초연할 수 있어야 한다."84) '행위로부터의 초연함', 이것은 지각의 작용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마쥬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인 지각의 작용은 실용적인 행위를 위하여 이마쥬를 선택하는 것으로서 이미 설명되었다.85) 그런데 이미Ⅰ장에서 밝혀진 것처럼, 지각이 직관으로, 다시 말해서 행위로부터 초연한 지각으로 변모함으로써 미적 의미를 획득한다고 할 때, 그 대상인 이마쥬 역시 미적 의미를 지닐 수 있음을 보장받는다고 하겠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직관 자체가 표현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으며, 그것은 개념과 이마쥬이다.86) 여기에서 이마쥬는 "보여질 수 있다는 점에서 물질에 가깝고, 더 이상 만질 수 없다는 점에서 정신에 가까운"87) 것으로서 직관과 개념 사이에서 매개적인 역할을 한다. 즉 "구체적인 직관의 단순성과 직관을 표현하는 추상개념의 복잡성 사이에 개재하는이마쥬"88)는 "직관 자체는 아니지만, 직관을 설명하기 위해서 의존해야만 하는 개념적 표현보다 훨씬 더 직관에 가까운 것이다."89) 이와 같이 이마쥬들의 작용과 그 수렴을 통해 지속에 대한 직관이 포착될 수 있다는 것은 결국 직관이 개념보다는 구체적인 이마쥬에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형이상학은. . . 개념들을 초월해서 직관에 도달해야만 한다."90) 베르그송은 지속에 대한 직관과 이마쥬의 긴밀함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단순한 직관, 혹은 적어도 그것을 표현하는 이마쥬에로 되돌아가자."91)
논의를 정리한다면, 이마쥬는 행위로부터 초연한 지각, 즉 직관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직관을 표현하는 매개로서 그 역할을 한다. 따라서 앞서 해명한 것처럼 지속에 대한 직관이 미적 의미를 획득함은 바로 이마쥬가 미적 의미를 획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직관의 대상인 지속을 드러내는 미적 방식으로 그 역할을 하는 이마쥬에 의해 지속은 미적 실재로서의 의미를 획득한다고 할 수 있겠다.
(2) 리듬의 미적 의미
1절의 (3)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베르그송은 각기 리듬을 지니는 지속들에 대한 언급을 통해 지속을 드러내는 미적 방식으로서의 리듬을 암시하고 있다. 베르그송의 철학에서 직관되어야 할 실재는 율동, 진동, 긴장, 파동, 진행, 계속, 지속, 강도 등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질적인 순간들 그 자체는 우리에게 리듬의 효과에 의해 지각된다. 여기에서 우리를 리듬의 황홀한(hypnotique) 효과 하에서 실재에로 이끄는 것은 사실상 모방이다. 따라서 리듬은 예술의 기법들이 겨냥하는 정신적 황홀92)을 우리 안에서 작용하는 효과적인 매개체이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리듬의 규칙성은 예술가와 우리들 사이의 일종의 교감을 세우고, 박자의 주기적 반복은 상상의 꼭두각시를 조종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실과도 같다. 이 운동의 리듬은 우리의 사유와 의지 전체가 되었다. 따라서 일종의 신체적 공감이 우아함에 대한 감정으로 될 것이며, 이 공감의 매력을 분석한다면, 이 공감은 자신이 교묘하게 암시하는 정신적 공감과의 친화력으로 인해 쾌를 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정신적 공감이라는 요소는 우아함이 지니는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을 설명해준다. 우아함의 본질은 움직이는 공감이다."93) 즉, 리듬은 우리와 예술가 사이의 공감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지속들이 각기 리듬을 지니다고 할 때, 이미 Ⅰ절에서 밝혀진 무관심적 공감으로서의 직관을 통해 지속의 리듬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결론적으로 베르그송의 철학에서 지속을 드러내는 미적 방식인 리듬의 효과는 이마쥬의 상상적인 효과를 넘어서서 실재에 대한 모방에로 이르게끔 한다고 볼 수 있다. 즉, 리듬은 이마쥬보다 더 효과적으로 실재의 미에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다. 이마쥬와 마찬가지로 리듬은 무관심적 공감, 다시 말해서 직관의 대상으로서 우리에게 실재에 대한 향유를 가져다준다. 이러한 실재에 대한 미적 향유는, 리듬이 지니는 미메시스의 효과에 의한 카타르시스라고도 할 수 있겠다.94)
Ⅲ. 지속의 분화로서의 생명의 도약과 창조적 정서
Ⅰ장에서는 형이상학의 방법인 직관의 미적 의미를 해명하고, Ⅱ장에서는 형이상학적 실재인 지속을 중심으로 이마쥬와 리듬의 미적 의미를 해명하였다면, 이 Ⅲ장에서는 베르그송의 형이상학 안에서 지속과 창조, 창조와 정서, 정서와 직관의 개념들 간의 관계를 설정하고 고찰해봄으로써 베르그송이 바라보는 형이상학과 예술의 관계를 해명하고자 한다. 우선은 『창조적 진화』의 논의를 중심으로 형이상학적 실재로서의 지속에 대한 이해를 한층 심화하여, 생명의 도약이 지속의 분화(différenciation) 운동으로서 창조를 의미한다는 것을 해명할 것이다. 이렇게 생명의 도약과 창조에 대하여 살펴본 다음,『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의 논의를 중심으로 창조적 정서(émotion créatrice)의 개념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이 창조적 정서의 개념에 대한 고찰을 통해 생명의 도약이 성공적으로 이행되는 것은 인간의 계열이며, 인간의 창조는 그 원동력으로서 정서를 요청한다는 것을 밝힐 것이다. 그리고 베르그송이 창조적 정서를 형이상학의 방법인 직관의 기원으로 보고 있음과 동시에, 또한 이 창조적 정서를 특권적으로 부여받은 영혼으로서 예술가를 주목하고 있음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창조적 정서가 형이상학과 예술에서 공통적인 원동력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밝힐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고찰을 통해 베르그송이 바라보는 형이상학과 예술의 긴밀한 관계를 해명하고자 한다.
1. 생명의 도약으로서의 창조와 인간
『창조적 진화』에 따르면, 생명은 그 본성으로서 지속을 지닌다. "생명의(vital) 속성들은 결코 완전히 실재화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실재화의 도상에 있다. 즉, 이것들은 상태들이라기보다는 경향들이다."95) 그리고 여기에서 베르그송은 생명의 도약은 분화하는 지속의 운동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즉, "생명은 요소들의 연합과 첨가에 의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분리와 양분에 의해서 나아간다."96)
이러한 지속의 분화로서의 생명의 도약이 가지는 두 가지 원인을 베르그송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생명의 세분은. . . 두 가지 계열의 원인들, 즉 생명이 무기 물질의 편에서 겪는 저항과 생명이 자신 안에 품고 있는, 경향들의 불안정한 균형에서 기인하는 폭발적인 힘에 있다"97) 먼저 생명으로서의 지속은 외적인 원인인 물질 안의 장애물들에 따라서 분화된다. 그러나 분화의 진정한 원인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것이다. 즉, "분화의 참된 깊은 원인들은 생명이 자기 안에 지니고 있는 원인들이다. 왜냐하면 생명은 경향이고, 경향의 본질은 - 오로지 그 성장에 의해서 자신의 도약이 나누어지는 분기 방향들을 창조하면서 - 다발의 형태로 전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98)
들뢰즈는 이상과 같은 지속의 분화 운동가 바로 현실화를 의미한다고 주장하고 있다.99) 왜냐하면 분화라는 것 자체가 잠재적인 단일성을 이미 전제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단일성은 분화의 방향들에 따라 나누어지지만, 각 방향에서 다시금 나타나는 것이다. 즉, "생명은 의식 일반과 마찬가지로, 기억과 마찬가지로 나아간다. . . 한 종의 다른 종에 대해 특수한 점에서 가지는 본능적인 인식은 그 뿌리를 생명의 단일성에 두고 있다."100)
이상과 같은 논의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즉, 생명의 진화 운동에 있어서 생명 안에 내재되어 있는 잠재성은 현실화되기 위하여 그 분화의 선들을 창조해야 한다. 따라서 생명의 도약은 현실화이며, 현실화로서의 생명의 도약은 창조이다.101) 이러한 창조로서의 생명의 도약을 물질과의 관계에서 다시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겠다. "물질은 타성(inertie)이고 기하며 필연성이다. . . 생명은 정확히 필연성 안에 위치해서, 그 필연성을 자기 이익으로 돌리는 자유다."102)
여기에서 베르그송은 다음과 같이 생명의 역사를 인간의 역사에 비유하고 있다. "인간 사회들의 진화에서나 개인적 생애들의 진화에서처럼 생명의 전체적 진화에서 가장 큰 성공은 가장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였던 자들을 위한 것이었다."103) 이와 같은 생명의 진화의 역사, 즉 창조의 전체적 역사에서 바로 인간이 주목되는 것이다. "인간에서, 오로지 인간에서 의식은 자유롭게 된다. 그 때까지 생명의 모든 역사는 물질을 들어올리기 위한 의식의 노력과 의식 위에 다시 떨어지는 물질에 의하여 다소간 이루어진 의식의 짓밟힘과의 사이에 나타난 역사다."104)
2. 인간의 창조적 정서
이미 1절의 말미에서 언급한 것처럼, 베르그송은 생명의 도약이 성공적으로 이행하는 계열로서 인간을 주목하고 있다. 즉, "창조적 노력이 성공적으로 이행되는 것은 오직 인간에게로 이르는 진화의 계열에서일 뿐이다. . ."105) 따라서 우주에 보다 많은 양의 비결정성과 자유를 심는 것을 소임으로 하는 진화의 원리에서 보면, 인간은 지구 위에 있는 전체적인 생명 구조의 존재 근거라고 할 수 있겠다.106) 그는 이와 같이 생명의 진화선상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우월성을 두뇌와 사회와 언어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인간의 우월성을 보장하는 두뇌와 언어와 사회는 따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유일하고 내적인 우월성이 각자의 방식으로 다양하고 외면적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뇌와 언어와 사회가 인간과 그 나머지의 동물성을 분리하는 본성상의 차이를 표현한다. 바로 이런 특정한 의미에서 "인간은 진화의 귀결이자 목적이다."107)
그런데 베르그송은 이렇게 진화의 귀결이자 목적으로서의 인간을 창조자로서 표현하고 있다. "삶의 예술가인 우리들은 과거와 현재, 전승과 상황에 의해서 주어진 물질을 가지고 조각가가 진흙에 부여한 형상처럼 유일하고 새롭고 독창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형체를 만들어낸다."108) 그리고 이러한 "창조능력을 터득하기 위해서는 우리자신에게로 돌아와 . . 자연의 경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109) 그렇다면, 이러한 인간 고유의 창조의 원동력을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인간의 창조는 정서(émotion)를 그 원동력으로 한다. "예술과 과학과 문명 일반의 위대한 창조가 새로운 정서에서 기원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110) 앞서 1절에서 인간은 생명의 진화운동에서 가장 성공적인 창조의 산물로서 해명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우월한 생명체로서 인간은 그 스스로 창조의 능력을 터득하며, 이 창조의 능력은 바로 정서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정서는 어디에서 비롯하는 것일까? 여기에서 연구자가 다음과 설명할 수 있겠다. 즉, 인간은 생명의 진화 운동에서 물질성을 탁월하게 제압하는 가장 자유로운 의식을 부여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그 자신 창조의 본성을 지닌 생명성으로서의 정서를 부여받은 것으로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창조적 정서만이 지성과도 본능과도 본성상 차이가 나며, 지성적인 개인적 이기주의나, 유사본능적인 사회적 압력과도 본성 상 차이가 난다.111) 다시 말해서 직관의 발생을 작동시키는 것, 즉 지성 자신이 직관으로 전환하거나 전환되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정서이다.112) 따라서 베르그송의 철학에서 창조적 정서는 형이상학의 방법인 직관의 기원으로서 부각된다고 할 수 있겠다.
이와 아울러 베르그송은 이 창조적 정서를 특권적으로 부여받은 영혼으로서 예술가와 신비주의자를 주목하고 있다.113) "예술가는 그토록 풍요하고, 개인적이고, 새로운 이러한 정서(émotion) 안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우리를 이해시킬 수 없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114) 이러한 예술가는 "내적 생명의 흐름 안에 자리잡는 것, 이러한 방향에 있어서 철학자보다 앞서 있다.115) 위의 논의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지성과 직관 사이에 정서가 개입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닫힌 영혼과 열린 영혼 사이에는 여는 영혼이 있다."116) 이 여는 영혼의 역할을 바로 예술가와 신비주의자가 하는 것이다. 즉, 이들의 직관은 정서를 통해 창조의 원리에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여기에서 베르그송은 이 특권적 영혼들이 부여받은 창조적 정서를 사랑(amour)으로 표현하고 있다. "신비주의적 사랑은. . . 본능을 연장시키지도 않고, 관념에서 나오지도 않는다. 그 사랑은 감각적인 것도, 이성적인 것도 아니다. 물론 그 두 가지가 거기에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 실제로 훨씬 더 이상의 것이다. . 그 사랑은 모든 것을 만든 사랑, 신의 그 피조물에 대한 신의 사랑과 일치하면서, 창조의 비밀을 묻고자 하는 이에게 창조의 비밀을 교부하여 준다. 그 사랑은 도덕적이라기보다 오히려 형이상학적인 본질에 가깝다."117) 결론적으로 연구자는 베르그송의 철학에서 창조적 정서가 형이상학과 예술, 그리고 신비주의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인 원동력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3. 창조적 정서를 공통 기원으로 하는 예술과 형이상학
이제 연구자는 이미 2절에서 해명한 것처럼 창조적 정서가 형이상학과 예술의 공통적인 원동력이라는 것을 통해서 베르그송이 바라보는 형이상학과 예술의 긴밀한 관계에 대한 해명하고자 한다.
베르그송은 그가 생각하는 참된 예술에 대한 견해를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다. 즉, 진정한 예술은 "모델의 개별성을 그려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그 목적을 위해서 예술은 눈에 보이는 선들 뒤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운동을 찾으려 하고, 그 운동 자체의 뒤에서 좀 더 비밀스러운 것, 즉 원초적 지향성, 개인의 근본적인 갈망, 형태와 색깔의 무한한 풍부함과 맞먹는 단순한 사유를 찾으려"118) 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예술적 창조란 "물질적 요소들이 생명적 존재로의 유기화할 때 부여해야 할 매력적인 상태"119)로 보고 있다. 이러한 예술적 창조에서 물질의 역할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겠다. "시를 말로 옮기는 물질적 실현, 에술적 개념을 조각이나 그림으로 바꾸는 물질적 실현 등은 노력을 요구한다. . . 그런데 물질이 없으면 노력도 불가능하였으리라. 물질이 뻗는 저항과 우리가 그 물질에서 끌어들이는 유순성에 의하여 물질은 장해물이고, 도구고, 자극제가 된다. 물질은 우리의 힘을 증명하고 그 힘의 흔적을 간직하고, 그 힘의 집중화를 부른다."120)
이러한 예술관의 피력과 아울러 베르그송은 그의 스승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설명하면서 형이상학의 목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개체적인 존재에 그 고유의 뉘앙스를 부여하면서 그 존재를 보편적 빛에로 연결시키는 그런 특정한 광선을 그 개체적 존재 내에서 재파악하고, 또 그 광선이 발산되어 나온 근원을 추적하는 것이 바로 형이상학의 목표이다."121) 사실 베르그송은 이렇게 자신의 스승을 인용하면서 형이상학과 예술의 연관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라베송의 시각을 빌려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이해하고 실천했던 그 예술, 즉 모델의 물질적 윤곽을 강조하거나 추상적 이상형을 위해 그것을 더욱 흐리게 하지 않고, 단순히 그것을 잠재하는(latente) 사유와 생산적인(génératrice) 영혼에로 집중시키는 예술의 철학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122)
결론적으로 베르그송은 예술과 형이상학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규정짓고 있다. "예술은 형태화된 형이상학이며, 형이상학은 예술에 대한 반성이고, 심오한 철학자와 위대한 예술가는 동일한 직관을 서로 다르게 적용시킴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다."123) 여기에서 Ⅰ장의 논의를 상기한다면, 형이상학과 예술은 둘 다 직관을 통해 실재를 파악하지만, 형이상학은 지성적 개념과 비유를 통해, 예술은 감각을 통해 그 직관된 실재를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맺음말
결론적으로 연구자는 베르그송의 형이상학을 "직관"과 "지속"과 "정서"의 세 가지 개념의 관계로 읽어낼 수 있었다. 먼저 직관과 지속의 관계는 형이상학의 방법과 대상의 관계로서 지속은 직관에 의해 파악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지속과 정서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겠다. 즉, 지속의 분화 운동으로서의 생명의 창조적 진화에서 인간은 가장 탁월한 생명성을 부여받으며, 이것이 인간에게 있어서 창조적 정서로서 구현된다. 마지막으로 정서와 직관의 관계, 엄밀히 말해서 창조적 정서와 직관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즉, 창조적 정서는 직관으로 하여금 창조를 본성으로 하는 지속을 파악하게 하는, 지속으로부터의 원동력이다. 따라서 직관과 지속과 정서의 관계는 순환적인 관계를 맺는다고 할 수 있겠다. 이상과 같은 논의들을 통해서 본 논문은 베르그송의 형이상학을 이루는 직관과 지속과 정서, 이 세 가지 개념과 그 긴밀한 관계를 중심으로 그 미학적 의미를 해명하고, 그럼으로써 베르그송의 형이상학을 미학적 이론으로서 이해할 수 있는 체계적 틀을 마련하고자 했다.
이제 연구자는 이상과 같이 베르그송의 형이상학에서 미학적 의미를 읽어내고자 하는 본 논문의 시도가 지니는 성과와 의의를 검토함으로써 본 논문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사실 베르그송 이후 그의 철학적 개념들이 지니는 미학적 의미들은 프랑스 현상학의 계보에 서 있는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뒤프렌느, 그리고 바슐라르 등에 의해서도 발전적으로 해석, 계승되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124) 따라서 베르그송의 고유한 개념들의 미학적 의미들을 그의 철학 안에서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본 논문의 시도는 다음과 같은 소박한 의의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즉, 후대에 계승되어온 개념들의 전개를 그 발생에서부터 살펴볼 수 있는 시각을 마련하고, 나아가서는 이러한 개념들을 원용하는 다양한 예술이론의 독해 혹은 저술의 준비작업으로서의 의의를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 베르그송의 형이상학을 미학적 이론으로서 이해하려는 본 논문의 시도는 탈형이상학을 논하는 오늘의 지적 분위기에서는 어떤 의의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개념적 사유의 고착성에 대해 누차 경고했던 베르그송의 형이상학이 개념적 사유의 부작용을 논하는 오늘에도 미학적 이론으로서 읽혀질 수 있고 활용된다면, 이것은 미학적 이론으로서의 가치를 통해 형이상학이 구제되는 잠재성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한다. 다시 말해서 베르그송의 형이상학이 미학으로서의 형이상학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잠재성을 가늠할 수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연구자는 본 논문에서 자세히 논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이러한 잠재성을 짚어낼 수 있다는 의미를 본 논문의 의의에 첨가하고 싶다.
* 이 글은 필자의 석사학위 논문 (98년 3월)을 축약한 것이다.
** 미학과 석사과정 졸업(98년 3월)
1) Cf. 최정식, 정신주의적 실재론의 연원, 과학과 철학(제4집), 통나무, 1993
2) 김진성, 베르그송 연구, 문학과 지성사, 1985, p.173
3) Ibid.
4) Cf. op. cit., pp.188-189
5) Cf. Kultermann, Udo., 김문환 역,『예술이론의 역사』, 문예출판사, 1997, pp.212-213
6) Cf. Deleuze, Gilles., Le Bergsonisme, Paris, P.U.F. 1968 (베르그송주의, 김재인 역, 문학과지성사, 1996)
7) op. cit., p.2
8) PM, p.1253
9) Ibid.
10) PM, p.1270
11) PM, p.1272
12) PM, p.1278
13) PM, p.1273
14) PM, p.1275
15) PM, p.1319
16) PM, p.1422
17) PM, pp.1415-1416
18) PM, p.1275
19) PM, p.1273
20) Deleuze, Gilles. Le Bergsonisme, Paris, P.U.F. 1968, p.3
21) MÉLANGES, p.604
22) DI, p.3
23) DI, p.146
24) DI, p.148
25) DI, p.149
26) PM, p.1399
27) DI, p.76
28) PM, p.1416
29) MÉLANGES, p.773
30) Ibid.
31) MM, p.161
32) MM, p.164
33) MM, pp.359-363
34) MM, p.184
35) MM, p.378
36) MM, p.222
37) MM, p.374
38) MM, p.213
39) MM, p.219
40) MM, p.359
41) Cf. Szathmary, Arthur., The Aesthetic Theory of Bergson, Cambridge, Harvard Univ. Press, 1937, p.9
42) EC, pp.620-622
43) EC, p.611
44) EC, p.635
45) EC, pp.643-644
46) EC, pp.645-646
47) PM, p.1370
48) PM, pp.1371-1372
49) PM, p.1373
50) PM, p.1377
51) PM, pp.1364-1365
52) Ibid.
53) EC, pp.645-646
54) MM, pp.359-363
55) PM, p.1449
56) PM, p.1420
57) PM, p.1419
58) Deleuze, Gilles. Le Bergsonisme, Paris, P.U.F. 1968, p.27
59) PM, p.1396
60) DI, p.59
61) Deleuze, Gilles. Le Bergsonisme, Paris, P.U.F. 1968, pp.30-31
62) PM, p.1261 "내적 생명이란 멜로디와도 같다", p.1312 "지속은 분할될 수 없는 멜로디의 연속성이며, 여기서 과거는 현재 속으로 들어와 분할되지 않는 전체를 형성하는데, 이 전체는 매순간 첨가되는 것의 덕택으로 분할되지 않는 것이다", p.1364 "불가분적으로 흐르는 실재적 시간의 연속적 유동성(fluidité). . 모든 것이 생성이지만 그 생성 자체가 실체적이기 때문에 담지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 멜로디처럼 계속 증가해가는 변화. . 생명의 안정성을 구성하고 있는 운동성", pp.1383-1384 "내적 삶의 영역에서 변화의 실체성이 가장 명백하다. . . 내적 삶의 연속적인 멜로디 . . . 우리의 의식적 실존의 처음부터 끝까지 불가분적인 멜로디가 단순하게 있을 뿐이다. 우리의 인격은 이같은 것이다."
63) PM, p.1384
64) PM, pp.1411-1412
65) PM, pp.1385-1390
66) Ibid.
67) ES, p.913
68) Cf. Deleuze, Gilles. Le Bergsonisme, Paris, P.U.F. 1968, pp.55-56
69) MM, p.276
70) MM, p.228
71) MM, p.216
72) MM, p.342
73) Deleuze, Gilles., Le Bergsonisme, Paris, P.U.F. 1968, p.75
74) Op. cit., p.76
75) PM, p.1417
76) DS, MÉLANGES, p.98-99
77) Cf. EC, p.540-568
78) EC, p.637
79) EC, p.503
80) Deleuze, Gilles., Le Bergsonisme, Paris, P.U.F. 1968, p.77
81) Ibid.
82) Cf. op. cit., p.24
83) Cf. MM, p.223 ". . . 생성 일반 안에서의 순간적인 자름(coupe). . . "
84) MM, p.228
85) MM, pp.359-363
86) PM, p.1357
87) PM, p.1355
88) PM, p.1347
89) Ibid.
90) PM, pp.1301-1402
91) PM, p.1348
92) DI, p.13 "예술의 기법들에서 사람들은 완화된(atténuée) 형태 하에서, 황홀함의 상태를 얻기위한 세련되고, 정신화된 기법들을 찾아낼 것이다."
93) DI, pp.12-13
94) Cf. Kremer-Marietti, A., "Physique et Métaphisique du Rythme comme Mimèsis", Revue Internationale de Philosophie 2/1991- n.177, pp.144-145
95) EC, p.505
96) EC p.571
97) EC, p.578
98) EC, p.579
99) Cf. Deleuze, Gilles., Le Bergsonisme, Paris, P.U.F. 1968, p.96
100)EC, p.637
101) Deleuze, Gilles., Le Bergsonisme, Paris, P.U.F. 1968, p.101
102) ES, p.824
103) EC, p.607
104) EC, p.719
105) MR, pp.1153-1154
106) 김진성, 베르그송 연구, 문학과 지성사, 1985, p.176
107) EC, p.720
108) PM, p.1333-1334
109) Ibid.
110) MR, p.1011
111) Op. cit., p.116
112) Op. cit., p.115
113) Op. cit., p.118
114) DI, p.15-16
115) Introduction (Première Partie) PM. p.1268
116) MR, p. 1028
117) MR, p.1174
118) Ibid.
119) PM, pp.1467-1468
120) ES, pp.831-832
121) PM, p.1456
122) PM, p.1461
123) Ibid.
124)Cf. 박준원, 프랑스 현상학에 있어서의 예술과 미학, 미학(제18집), 한국미학회, 1993, Spiegelberg, H., 최경호 역, 현상학적 운동Ⅱ, 이론과실천,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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