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죽음의 배후에는 구멍이 있다. 그 구멍은 자신 속에서, 혹은 그것의 내부에서 기생하는 벌레가 갉아 파먹은 흔적이다.1) 구멍은 죽음을 시작하는 하나의 공간이며, 죽음이 시작하는 동시에 발생하는 삶(벌레의)의 하나의 공간이다. 구멍은 외적 원인에 의한 내적 상흔이며, 그 상흔은 증상이 심화될수록 커지고 결국 그 구멍은 외부로 드러나는 순간 죽음을 맞이한다. 따라서 구멍은 외부의 어떤 인자가 그것 의 내부로 들어와 번창하고, 결국 또 다시 그 원래의 위치 즉 외부로 뚫고 나갈 때 그것을 소멸시켜 버리는 과정의 소산이다.
벌레와 그것의 관계는 숙주와 기생충의 관계와 같다. 벌레는 주혈흡충(schistosoatidae)2) 처럼 숙주의 몸을 뚫고 들어가 목적지를 향해 이동하고, 그 목적지에서 번식하여 다시 외부로 나온다. 구멍의 원흉인 벌레는 어떤 지향된 장소를 찾아 간 후 번식 즉, 그것의 죽음의 시작과 벌레의 삶을 동시에 시작한다. 벌레는 그것의 외부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외부에 있는 수많은 벌레 중 그것의 어떤 외상(trauma)에 적합한 놈들이 침투한다. 침투한 벌레들은 그것의 내부에 있는 목적지를 찾아 가고, 그 목적지에 도착한 후 성장하여 다시 외부로 나아간다. 그 과정상의 구멍에는 외상의 시작점과 목적지 사이의 구멍, 목적지의 구멍 그리고 다시 외부로 향하는 구멍이 있다.
외상의 시작점과 목적지 사이의 구멍은 명확한 방향성을 가진다. 따라서 그 구멍은 목적지를 향한 대권항로(great-circle route)를 지향하며, 두 점 사이의 가장 짧은 거리의 구멍이다. 벌레는 이 구멍을 만들고 목적지를 향해 나아갈 동안 숙주에게 어떠한 반응 혹은 증상을 유발하지 않고, 그 구멍 이외에는 어떠한 피해도 주지 않는다. 목적지의 구멍은 어떠한 방향성도, 거리도 없다. 그 구멍들은 벌레들의 번식을 위한 먹이이며, 개체 증식을 위해 필요한 공간일 뿐이다. 이 구멍들은 장기체류를 위한 무수한 구멍들의 다발이다. 이때 숙주는 기생충에게 살아있는 한 개의 섬과 다름없다.3) 이 섬의 구멍들은 모든 구멍들과 연결되고, 점점 그 구멍들과 구멍들간의 연결은 복잡해지면서 다발을 형성하고, 결국 그 다발은 하나의 큰 구멍이 된다. 결국 그 목적지는 큰 구멍이 되며, 그것의 죽음 혹은 소멸의 원인이 된다. 외부로 향하는 구멍은 또 다시 방향성과 대권항로를 지향한다. 큰 구멍이 되어버린 그것의 내부는 더 이상 벌레들의 서식처 혹은 번식의 공간이 되지 못한다. 이 구멍은 텅 비어버린 그것의 내부로부터의 탈주를 위한 통로이다. 이 구멍은 더 직선적이며, 단지 외부를 향한 최단의 거리와 시간만이 중요하다. 이 구멍이 그것의 외부를 뚫는 순간, 텅 비어버린 그것의 내부는 자신을 주체할 수 없게 되며, 결국 소멸한다. 이 구멍은 또 다른 숙주를 찾아가는 새로운 삶의 여정이자 그것이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이다.
구멍은 인간의 의식구조에 또한 존재한다. 이것은 하나의 부재이며,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인 동시에 의식의 순간적 죽음이다. 이 의식구조의 부재는 피크노렙시(picnolepsie)이다.4) 이 부재의 시간은 인간의 의식의 흐름에 난 구멍이며, 인간의 영원한 죽음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구멍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의식의 구멍들은 과거의 구멍들이며, 현재 발생한 구멍 또한 더 이상 현재의 구멍이 아니다.5) 따라서 모든 의식의 구멍들은 과거의 구멍들인 동시에 그 구멍들은 우리의 기억 속에 존재하지 않는 단지 물리적 시간의 긴 선상에 하나의 까만 점과 점 사이에만 존재하는 구멍들이다.
의식의 구멍들은 시간의 선상에 축적된다. 그것 속의 벌레처럼, 피크노렙시는 의식의 벌레이며, 우리의 의식은 숙주이다. 피크노렙시들 즉, 의식의 벌레들은 결국 의식에 커다란 구멍을 내고, 숙주인 의식이 사라질 때까지 그 속에 기생한다. 뇌의 신경세포는 5세부터 돌이킬 수 없이 줄어들기 시작한다.6) 따라서,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 의식에 구멍이 생기기 시작하여, 육체의 쇠락과 함께 의식의 구멍은 출현 빈도가 증가한다. 결국 의식의 구멍들은 의식의 결속을 해체시키고, 의식의 구조를 붕괴시킨다.
이러한 죽음의 배후에 있는 구멍들은, 건축이라는 문화적 복합체 속에 또한 존재한다. 문화적 복합체로서의 건축은 예술, 과학, 종교 그리고 철학 등의 문화들이 융합된 하나의 생명체이다. 하지만 생명체가 어떤 법칙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법칙들을 다양하게 변화시키는 존재나 사건 속에서 살고 있듯,7) 건축은 시대의 문화적 사건 속에서 변화하며 살고 있다. 종교와 형식, 이성의 시대, 주의와 실험정신 그리고 이탈과 다원주의8) 이 모든 것은 건축의 삶이며 또한 구멍들이다.
건축에 있어서, 그 생명체를 형성했던 것들이 시대의 변화와 사건 속에서 구멍이 된다. 그 구멍을 발생시키는 사건들은 외부의 수많은 벌레들처럼 건축 주위를 부유하다가, 적당한 변화(외상)의 조짐을 포착하여 숙주인 건축 속으로 파고 들어 구멍을 내고, 번식하여 그 시대의 숙주를 소멸로 이끈다. 물론 절제하지 못하는 벌레는 숙주의 완전 소멸을 야기하지만,9) 건축 속의 벌레들은 자제력을 가진다. 따라서 건축은 완전 소멸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길 혹은 현대적 관점에서 진화의 길을 걷고 있다.
고대 건축은 종교적 변화라는 구멍에 죽었지만, 바실리카(basilica)라는 또 다른 변종이 발생했고, 변화한 종교의 내적 갈등의 구멍에 의해 로마네스크(Romanesque) 그리고 고딕(Gothic)이 발생했다. 또한, 과거의 재 창조와 부흥이라는 변화의 구멍은 르네상스(Renaissance) 건축을, 변화와 다양성에 대한 갈망의 구멍은 바로크(Baroque) 건축을 탄생시켰다. 이렇듯 건축은 이후의 낭만주의, 아르누보, 아방가르드 등등 이 모든 구멍들과 앞으로 나타날 구멍들은 분명히 건축 안에서 소멸 또는 변화를 이끌었다. 분명 그 소멸과 변화의 뒤에는 구멍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건축은 그 몸체가 되었던 수많은 문화적 요소들이 구멍이 됨으로써, 그리고 그 구멍에 의해 변화 혹은 진화를 거듭한다. 하지만, 오늘날 건축에 있어 그 구멍들을 규정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포스트모던 이후, 메타서사의 종언, 역사의 불연속, 다양성 그리고 비결정성10) 은 건축에 수 많은 구멍들을 양상 시켰으며, 그 구멍들은 목적지 구멍처럼 어떠한 방향도 거리도 없이 수많은 구멍들의 다발로 엉킨, 죽음의 원흉이자 그 전초인 것 같다. 그 구멍의 다발들은 과거였으며 현재이고 미래일 세상 모든 것들이다. 그 구멍들은 서로 엉켜있으며, 서로를 뚫고 지나가고 시작점과 끝점이 없어진 그 무엇이다.
구멍들의 다발을, 그 죽음의 징후를 발견하지만 정체를 알지 못한다. 급속히 번져버린 말기 암의 덩어리처럼, 구멍들은 그 죽음의 배후에 있다. 아서단토가 말한 예술의 종말11) , 특별한 방식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의 인식이 오늘날 건축의 죽음, 그 배후에 있는 구멍일 것이다. 또한 단토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말한 국제화된 경제적 모험의 전지구화를 반영하는12) , 이러한 구멍들은 좀더 강한 자극의 생산을 종용하는 후기자본주의의 특성 즉, 소비자를 자극함으로써 얻게 되는 이익의 수단으로서 건축이 등장 한 것이다. 이것은 건축의 광고화, 철저한 상업화의 얼굴로 변해가는 구멍 뚫린 건축의 모습니다.
오늘날 건축은 구멍들의 다발을 그 안에 담고 있다. 이 구멍들이 건축의 진화를 가져올지 혹은 소멸(극적인 변화)을 야기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건축 내부의 무수한 이론의 생성과 건축 외부와의 끊임없는 이종교배에 의한 구멍들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수는 없다. 어느 시점에, 이 구멍들이 하나의 변화(소멸 또는 진화)를 위한 점에 도착하여, 외부로 향하는 구멍이 될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끈기를 가지고 커져가는 구멍들의 다발을 관찰하고 분석해야 한다. 그 구멍들이 폭발하여 외부로 향할 때, 그 격변의 순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는 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과거, 우리가 격변의 상황에서 대처한 결과로 인해, 세계의 건축 앞에서 지금, 이렇게 초라하게 서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후 세대가 좀더 강한 우리의 건축을 말할 수 있도록, 지금 우리는 그 구멍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1) 알베르 카뮈, 시지프스의 신화, 장재형 역, 다문, 1991, p. 19
부동산 관리인의 죽음에 대한 예에서, 그의 딸의 죽음으로 인한 내부의 구멍과 그 구멍의 원흉인 벌레에 대해 짧게 언급한다.
2) 칼 짐머, 기생충 제국, 이석인 역, 궁리, 2004, pp. 60-64
주혈흡충은 숙주인 달팽이에서 인간의 발목을 찾아가 인간의 피부를 뚫고 들어간다. 이후, 혈관을 따라 이동하다가 간에 정착하여 번식하고 알들을 몸 밖으로 보낸다.
3) Ibid. p. 92
4) 폴 비릴리오, 소멸의 미학, 김경온 역,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4, pp. 27-28
부재는 아침 식사를 할 때에도 느닷없이 자주 일어난다……부재의 시작과 끝은 갑작스럽기 그지없다……부재는 무수히 많이 발생할 수 있다. 날마다 수백 번의 부재가 발생하지만 대부분 또렷이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지나간다. 그런 경우에 사람들은 피크노렙시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정작 피크노렙시를 겪은 사람 자신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부재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5) 베르그송, 물질과 기억, 홍경실 역, 교보문고, 1991, p. 167
현재는 단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현재를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할 때 이미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사실 모든 지각이 이미 기억이다. 실제로 우리는 과거만을 지각하며 순수한 현재란 미래를 침식하는 과거의 파악할 수 없는 진전이다.
6) 폴 비릴리오, op. cit. p. 36
7) 조르주 캉길렘, 정상과 병리, 이광래 역, 한길사, 1996, p. 205
8) 곰브리지, 서양미술사, 백승길, 예경, 2003, pp. 475-477, 557-558, 617-622
한 시대의 양식이란 바람직한 효과를 얻기 위한 방법이기 때문에 채택할 뿐이었고, 이성의 시대에서 그 올바른 양식에 대한 회의와 의심을 가진다……20세기 건축은 양식이나 장식의 편견에서 탈피해, 자유롭고 새로운 실험으로 현대적 양식들을 지속적으로 창출하는 미술 분야가 된다……전통으로부터의 이탈과 그로 인한 진보 그리고 다양성에의 개방이라는 포스터모던의 징후들이 나타난다.
9) 칼 짐머, op. cit. p. 379
자제할 줄 모르는 기생충은 스스로를 파멸시키고 자신의 숙주마저도 그 대가를 치르게 하고 만다.
10) 데이비드 하비,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 구동회 역, 한울, 1994, pp. 25-26
포스트모더니즘은 문화 담론을 새로이 정의하는 해방의 힘으로서 이질성과 차이를 중요하게 여긴다. 분절화와 비결정성, 그리고 모든 보편적 담론이나 전체주의적 담론에 대한 강한 불신은 포스트모던 사상의 특징이다……역사의 불연속과 차이, 다종 다양한 상호관계 그리고 비결정성은 메타서사에 대한 거부이다. 여기서 메타서사는 보편적 인류역사라는 환상을 합리화하고 그 근거를 제공하는 폭력적 기능을 갖고 있는 이론적 해석들이다.
11) 아서 단토, 예술의 종말 이후, 이성훈 역, 미술문화, 2004, p. 242
미술이 종말에 도달하였을 때, 말하자면 예술작품이 어떠해야 한다는 특별한 방식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미술이 인식했을 때, 그린버그 내러티브도 종말에 이르렀다…….예술가들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그 무엇이든 할 수 있게 해방되었다.
12) Ibid, p. 18
예전에는 예술적 안정성이 정치적 연속성을 반영하였다면, 예술동향의 국제화는 경제적 모험의 전지구화를 반영한다. 과거에 지금처럼 많은 장소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 의해 예술이 만들어지고 감상되어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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