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인간의 정체성 형성 오늘날 인성을 논할 때 사용하는 개념들은 예부터 내려온 개념들도 있으나 대개 서구 근대 철학에서 유래하는 개념들을 불교 및 성리학의 용어들을 활용해 번역한 개념들이다. 감각·지각·상상·기억·감정·판단·오성·이성 … 등이 대표적인 개념들이다. 이런 개념들에 관한 논의들이 ‘인성론(人性論)’을 구성하거니와, 이렇게 인성을 논할 때 결코 뺄 수 없는 핵심 개념들 중 하나가 기억이다. 기억이라는 개념은 인간이라는 존재, 나아가 생명이라는 존재를 해명할 때 결정적인 구실을 하는 개념이며, 따라서 철학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는 개념이다. 앙리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 같은 저작이 그 대표적인 경우라 하겠다.
기억이라는 존재는 시간과 밀접한 연관을 띤다. 시간은 늘 생성과 소멸을 가져온다. 우주는 시간에 따라 끝없이 변해간다. 현대 물리학이 가르쳐 주었듯이, 견고해 보이는 사물들의 내부에서도 무수한 입자들의 복잡한 생성들이 일어나고 있다. 또 생명체들은 태어나서 성장하다가 늙어 감을 겪고 죽는다. 성장과 노화도 미시 수준에서 보면 세포들의 생성과 소멸이므로, 이 우주에서는 단 한 순간도 모든 것이 정지해 있는 경우란 상상할 수 없다. 우주를 지배하는 절대 진리는, 적어도 진리들 중 하나는 시간인 것이다. 그러나 기억은 시간의 작용을 전혀 다른 무엇으로 바꾸어버린다. 기억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주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되지 않을까?
시간이 끝없는 생성과 소멸을 가져온다면,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면, 우주에는 그 무엇도 지속되는 것, 반복되는 것이라곤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찰나의 생성만이 존재하는 세계일 것이다. 그러나 세계에는 기억의 작용이 존재하기에 지속과 반복이 존재한다. 기억의 작용은 생명을 낳았다. 생명을 통해 갖가지의 존재들(각종 개체들, 색깔·모양 같은 성질들, 무수한 사건들 …)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이 우주에서 지속되거나 반복된다. 이런 지속과 반복이 아니라면 세계란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채송화가 채송화를 낳고, 철수가 자신을 쏙 빼닮은 자식을 낳지 않는다면, 세계란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사랑·미움·배반·만남·싸움·질시, 태어남과 죽음 … 등의 사건들이 반복되지 않는다면, 세계란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기억은 정신이라는 존재를 통해서 전혀 다른 차원을 획득하게 되는데, 그것은 단지 기억의 ‘용량’이 커진다거나, 정보를 저장하고 활용할 수 있다거나(예컨대 우리는 물건들이 어디에 있는지 기억에 저장해 놓았다가 꺼내 쓰곤 한다), 기억 내용들을 편집까지 할 수 있다거나(예컨대 우리는 마음속의 기억 내용들에 ‘상상’을 가한다) 하는 것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기억을 활용함으로써 각종의 창작 행위를 하는 것(예컨대 기억이 동원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글을 쓸 수 없을 것이다)조차도 아니다. 정신 수준에서의 기억이 가져온 심대한 결과는 한 인간의 주체성, 정체성, 내면을 가능케 한 것이며, 사실상 이런 차원들이 전제되어야 방금 열거한 기능들도 가능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변화·차이 불인정땐 ‘집착증’ 기억은 한 인간의 정체성을 가능케 한다. 한 인간이 겪은 사건들은 기억의 형태로 쌓이며, 그렇게 쌓인 독특한 사건-계열들이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한 인간의 고유한 내면을 형성한다. 한 인간의 동일성과 정체성은 다르다. 동일성은 형식적 구조이며 죽어버린 논리적 똑같음에 불과하다. 그러나 정체성은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 시간 속에서 변해가면서도 시간이 가져오는 차이들을 보듬으면서 ‘자기’라는 것을 만들어갈 때 성립한다. 정체성은 시간의 와류(渦流)에 떠밀려가면서도 기억과 반복을 통해 자기를 만들어가는 인간이라는 존재에게서 성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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