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avobo

Wednesday, May 03, 2006

몸의 확장과 도시

몸의 확장과 도시
조광제(철학, 철학아카데미 공동대표)


1. 몸의 확장

1.1. 지각과 운동의 실질적이고 함축적인 결합

몸의 신비 중 가장 심오한 것은 지각이다. 지각하는 주체인 몸이 어떻게 운동하는가에 따라 지각되는 광경이 바뀐다. 지각하는 주체인 몸이 자신의 운동을 직접 감지하는 것을 운동감각적 감각(kinästhetische Empfindung, sensation sensori-moteur)이라 한다. 내 몸의 운동감각적 감각의 변경 체계와 지각되는 광경의 변경 체계는 항상 1:1로 일치한다. 나의 지각은 나의 운동과 필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시각에만 집중해 보면, 머리를 올려다보면 그에 맞추어 높은 쪽의 이미지들이 보이고, 머리를 아래로 향하면 낮은 쪽의 이미지들이 보인다. 천천히 걸어가면 지각되는 광경이 바뀌면서 천천히 다가오고, 뛰어가면 지각되는 광경이 빠르게 바뀌면서 빨리 다가온다.
지각되는 광경 속에서 움직이는 것들은 나의 몸의 위치를 원점으로 해서 광경의 좌표계에 흔적을 남긴다. 마주 보고 있던 두 개의 기차 중 하나에 타고 있을 때, 저쪽 기차가 움직이는데 내가 탄 기차가 움직이는 것처럼 여겨지거나 그 반대의 지각이 일어나는 것은 이를 잘 말해 준다. 지각과 운동, 특히 내 몸의 운동은 지각에서 필수적인 변수로 작동한다. 지각되는 광경이 함수라면 내 몸은 핵심적인 변수인 셈이다.
그런데 실질적인 관계에서 보면, 지각되는 되는 광경이 어떠하냐에 따라 내 몸이 운동한다. 내 몸이 운동을 하는 까닭은 순간순간 주어지는 명시적이거나 암묵적인 과제에 의거한 것이지만, 그러한 과제가 설정되는 곳은 지각되는 광경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내 몸의 지각과 운동은 상호 작용하는 방식으로 서로 필연적으로 결합되어 있어, 실제로는 어디에서부터 나의 지각이고 어디에서부터 나의 운동인지 구분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이 사실은 몸을 확장하는 기본적인 원리가 된다. 나에게 지각되는 광경은 내 몸을 벗어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내 몸의 운동적인 상태와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어 따로 분리해 내는 것은 잠정적인 조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가상현실 기술의 원리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그대로 적용해서 이루어진다.

1.2. 몸과 상황의 결합

몸을 물리적인 관점으로 보거나 생리학적인 관점으로 보게 되면, 이른바 즉자적인 물체 내지는 기관화된 몸이라 일컫게 된다. 그런데 몸을 현상학적으로 보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몸은 지평적인 연관 속에서 의미화 된다.
세계에의-존재인 몸은 항상 세계 속에 있으면서 세계와 하나이고자 한다. 이때 하나라고 하는 것은 물리적인 관점으로는 풀어낼 수 없는 현상에서의 일이다. 물리적인 관점에서 보면 하나의 물체가 지닌 자기동일성은 주변과의 모든 관계들을 고려치 않은 이른바 즉자적인 자기동일성인데 반해, 현상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하나의 물체가 지닌 자기동일성은 주변과 의미를 주고받는 가운데 그 경계를 정확하게 가늠할 수 없는 이른바 열린 자기동일성이다. 몸과 세계의 하나됨(통일성)은 이와 같은 열린 자기동일성이다. 달리 말하면, 주변과의 관계에 의해 유동하는 자기동일성이다.

1.3. 몸 공간의 특유성

몸 공간은 여러 층으로 되어 있다. 첫 번째로 몸 공간은 몸의 피부에 의해 둘러쳐진 일차적인 공간이라 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몸 내적인 공간이라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몸 공간은 몸을 벗어나서는 의미를 지닐 수 없는 주변의 지평적인 공간 전체라 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이는 확장된 몸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첫 번째의 몸 공간은 역시 물리적인 관점으로는 쉽게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 몸 내적인 공간은 상호 외부적인 국소적인 부분들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즉각적으로 상호 소통하면서 서로에게 내속하는 전체적인 부분 혹은 부분적인 전체로 되어 있다. 예컨대 손가락들을 빠르게 움직이면서 타자를 칠 때, 몸 공간은 손가락이 움직이는 공간을 중심으로 전체적으로 수렴된다. 또는 책상에 몸을 기대고 서 있을 때, 책상에 기대고 있는 엉덩이 공간을 중심으로 몸 공간 전체가 수렴된다.
요컨대 몸 내적인 공간은, 마치 혜성처럼 한 곳으로 집중되는 공간이 있고 그 공간을 중심으로 다른 모든 공간들이 쏠리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 중심이 되는 부분적인 몸 공간은 나머지 전체 몸 공간을 끌어당기면서 몸 공간 전체를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존립케 한다. 그런 점에서 부분적인 전체고 전체적인 부분이다. 완전한 전체로서 볼 때 몸 내적인 공간은 잠재적이다(virtuel). 기실 몸이 운동을 하면서 실현할 수 있는 현행적인(actuel)인 몸 내적인 공간은 부분적인 전체로서의 몸 내적인 공간이고, 몸의 운동이 어떠하냐에 따라 계속 새롭게 실현될 수 있는 현행적인 몸 내적인 공간의 가능성 전체가 바로 완전한 전체로서의 몸 내적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의 확장된 몸 공간은 마치 몸 내적인 공간의 구조적인 관계를 확장한 것 같은 구조적인 관계를 띤다. 한 몸은 그 몸을 둘러싼 주변의 모든 도구들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들을 끌어당겨 자신의 공간을 확장한다. 타이프를 칠 때 손가락의 공간이 몸 내적인 공간 전체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겨 수렴시키듯이, 한 몸은 주변의 모든 도구적인 공간들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겨 수렴시킨다. 그러니까 몸이 움직이면 주변의 모든 도구적인 공간들의 방향과 그에 따른 의미가 변하면서 체계적으로 변환되는 것이다.
요컨대 한 몸의 내적인 공간은 주변의 모든 공간들을 유동적이면서 다질적이게끔 하는 중심 역할을 한다.

1.4. 나와 타인의 공간적인 교직

문제는 모든 몸들이 그와 같이 주변의 공간들에 대해 중심 역할을 하면서 주변 공간을 항상 특유하게 어떤 질적인 힘을 갖도록 변환시킨다고 할 때, 몸들 간의 공간적인 관계가 대단히 복잡하게 얽힌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사람들 간에 공간적인 중심들이 각기 다른 위치에서 힘을 발휘하면서 그 공간적인 힘들이 서로 얽히게 될 때, 공간적인 차원에서 이미 정치적인 관계가 성립한다. 내 몸이 공간적으로 뿜어내는 힘들이 다른 사람들이 공간적으로 뿜어내는 힘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우월하다는 것은, 마치 네트워크 과학에서 ‘허브’가 여러 관계들 속에서도 나름의 강한 중심으로서 힘을 발휘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뿜어내는 공간적인 힘들을 얽힘 속에서도 수렴해 내는 정도가 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강의 시간에 강의하는 사람의 몸은 강의를 듣는 사람들의 몸에 비해 발휘하는 공간적인 힘이 더 강하다. 연극에서 주인공의 몸이 뿜어내는 공간적인 힘은 다른 연기자들의 몸이 뿜어내는 공간적인 힘보다 더 강하고, 관객들의 몸이 뿜어내는 힘보다 더 강한 것이 일반적이다.

1.5. 공간의 질적인 유동성

이렇게 몸을 공간의 질적인 유동성을 자아내는 원천으로 보게 되면, 이제 모든 공간들은 결코 객관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거대한 빙하가 서서히 움직이면서 빙하 속에 들어 있는 모든 물체들의 역관계를 다르게 만들듯이, 지독히도 유동적이고 다질적이며 다공적(多孔的)인 것임을 알게 된다.
표면적인 가시성에 의거해서 보면, 공간이 객관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심층적인 비가시성에 의거해서 보면, 공간은 그렇게 유동적이고 다질적이며 다공적인 방식으로 존재하면서 수 없이 겹치고 주름지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2. 도시의 구성

2.1. 도시의 공간적 이중성

이렇게 몸 공간을 고려하게 되면, 사람들이 빽빽하게 모여 사는 도시의 공간이란 정말이지 자연의 공간이나 농촌의 공간에 비해 훨씬 더 ‘끓어오르고 있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끓어오르고 있는 도시의 공간이란 그 자체로 놓아둘 수는 없다. 무조건 끓어오르기만 하는 공간은, 예컨대 많은 인파들이 공짜 연주회를 구경하기 위한 공개된 자리를 서로 차지하려고 한꺼번에 몰려들 때처럼, 너무나도 교차와 교직이 강화된 나머지 뒤죽박죽이 된 일종의 카오스적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카오스적인 공간은 일정하게 질서 지워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럴 경우, 거기에 사는 몸의 운동 역시 무질서해지면서 평소 훈련해 온 몸틀을 제대로 작동시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카오스적인 공간을 코스모스적인 공간으로 변경하고자 하는 데서 명령법 혹은 명령 체계가 생겨나면서 힘을 발휘하게 된다. 도시 공간을 구성한 중요한 두 요소 건물과 도로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공간적인 힘들이 일정한 방향을 따라 작동하도록 하는 거대한 공간적인 명령 체계다. 여기에서 명령 체계는 모든 사람들이 하는 몸의 운동을 겨냥한다. 그런 점에서 도시 공간은 나름의 객관적이고 결정적인 측면을 지니게 된다.
요컨대 도시 공간은 근본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의 몸들이 뿜어내는 카오스적인 차원의 다질적인 공간들의 무한 겹겹의 교차로 이루어지지만, 이를 조정하기 위한 명령 체계로서 객관적이고 결정되는 방식의 이차적인 공간적 힘들이 발휘되는 이른바 이중적인 거대 공간인 것이다.

2.2.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들의 함축적인 결합

이동 가능한 것과 이동 불가능한 것이 뒤섞이면, 이동 불가능한 것은 이동 가능한 것들에 의해 그 이동 불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약화된다. 그 반대로 이동 가능한 것은 이동 불가능한 것들에 의해 그 이동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약화된다. 자동차들이 건물의 벽을 뚫고 지나갈 수는 없고, 한 건물에 대한 접근의 수월성 여부는 그 건물의 상대적인 이동성을 결정한다. 태산을 즉자적으로는 옮길 수 없지만, 사람들이 태산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모든 조건들을 강화하게 되면 태산은 사람들 쪽으로 움직인 셈이다.
자연적인 인간의 몸으로써 움직일 수 있는 속도는 한정되어 있다. 이를 넘어서기 위한 각종 운송 도구들은 인간의 몸을 빠른 속도록 움직이도록 한다. 지각과 운동의 실질적이고 함축적인 결합을 감안해서 보면, 도로를 통해 혹은 지하철의 선로를 통해 사람들의 몸이 빠른 속도록 움직인다는 것은 그에 따라 지각되는 광경이 빠르게 변경되고 바뀌는 것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몸들이 수행해야 하는 과제는 기본적으로 지각되는 광경에서 성립되기 때문에, 지각되는 광경이 빠르게 바뀌게 되면 몸이 수행해야 하는 과제의 성격 역시 달라진다. 과제의 성격이 달라지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몸의 운동 역시 그 성격이 달라진다. 모든 것이 빨라진다고 해서 수행해야 할 과제를 더 빨리 수행하고 따라서 남은 시간에 여유를 즐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쉽게 무너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도시의 동선들은 자동차와 지하철 심지어 퀵 서비스 오토바이들에 의해 겹겹이 복합적으로 결합되면서 사람들이 수행해야 할 과제들을 양과 질에 있어서 최고도로 증폭시킨다. 만약 도시 공간이 더욱 더 몸 운동의 속도를 높이기 위한 방향으로만 발달한다면, 그 속에서 살아가는 숱한 사람들의 삶은 그런 만큼 더욱 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어쩔 수 없이 타율적인 방향으로 치닫게 될 것이고, 이른바 톱니바퀴와 같은 삶을 산다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2.3. 몸의 자연적인 운동과 인위적인 운동

도시에서 이루어지는 사람들의 몸 운동이 빠르면 빠를수록 원리상 카오스적인 공간이 강화된다. 또 그런 만큼 도시의 공간에는 더욱 더 미세한 많은 명령 체계들이 필요하다. 현대의 발달된 도시 공간은 그 자체로 명령 체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길 안내 표지판들, 인도와 차도의 구분, 도로의 선들, 금지구역 표지판, 지하철 역사에서의 각종 이동 경로, 심지어 모든 건물들의 벽과 문의 구분, 건물들과 도로의 구분, 금연구역, 건물 속의 모든 종류의 통로와 작업 공간의 구분 등. 철저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완전한 명령 체계로 짜여 있다.
도시 공간의 명령 체계들은 몸의 인위적인 운동을 강요한다. 몸의 자연적인 운동은 하릴없이 기웃거리듯이 이루어질 수도 있고, 지각되는 광경을 구경하듯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 언제든지 방향을 바꿀 수 있고, 멈출 수도 있고 다시 갈 수도 있다. 오던 길을 되돌아 갈 수도 있고, 되돌아가다가 괜히 멈추어 서서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몸의 자연적인 운동이란 맨몸으로 이루어지는 운동이다.
몸의 인위적인 운동은 반드시 어떤 특정한 과제를 수행해야 할 때 나타난다. 지금처럼 강의원고를 준비하느라 타이프를 쳐야 할 때, 지하철을 타야 할 때, 공중 화장실을 사용해야 할 때, 아니 모든 도시 생활은 거의 인위적인 운동으로 이루어진다. “너무 바빠 소변을 보고 난 뒤 뭐 볼 시간도 없다.”라는 말이 있다. 몸의 자연적인 운동은 어쩌면 맹목적이고 철저히 비실용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반면 몸의 인위적인 운동은 항상 목적을 염두에 두고서 이루어진다.
이 두 운동이 딱 부러지게 구분되지 않음은 물론이다. 이미 우리는 도시 공간의 각종 명령 체계에 완전히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길들여지게 되면 처음에는 인위적인 운동도 마치 자연적인 운동인 것처럼 말 그대로 자연스러울 수 있다.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세계에의-존재로서의 몸과 그 존재를 실현하기 위한 몸틀의 형성은 이를 잘 설명해 준다. 하지만 메를로-퐁티는 우리에게 몸이 어떤 방향으로 주로 운동하는 것이 좋은가를 제시해 주지 않는다. 도시라는 상황이 우리의 세계로 주어진다면, 우리는 무조건 도시의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가? 그런 것 같지는 않다.

2.4. 공원과 광장의 위력

하지만 몸이 끊임없이 인위적인 운동만 일삼으면 몸은 사회적으로 코드화될 것이고, 그런 탓에 몸이 알게 모르게 폐쇄된다는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도시 공간이 뭔가 엄청나게 풍부한데도 왠지 행복하다는 느낌을 주지 못하는 것은 몸의 운동이 그렇게 오로지 인위적인 운동만으로 점철되기 때문일 것이다.
자연적인 운동을 유도하기 위한 도시 공간의 주요한 두 구성 요소는 공원과 광장이다. 세련되게 잘 짜 놓은 공원이 아니라 일단 들어가면 마치 밀림에 들어온 것처럼 일종의 카오스적인 운동과 그에 따른 공간이 펼쳐지는 공간이어야 한다. 철저한 명령 체계적인 도시 공간에 풀어 놓은 밀림이 공원이다.
광장은 묘하다. 아무 것도 없이 환하게 펼쳐져 있는 광장은 공원과 완전히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또 다른 카오스적인 공간을 제공한다. 빗물이 빠지기 좋게만 해 놓은 넓디넓은 흙바닥만이 아무 길도 없이 펼쳐져 있을 때 거기를 거니는 사람들의 몸은 도대체 어떤 느낌을 갖게 될까? 도시 공간에 풀어놓은 일종의 사막과 같은 곳이 광장이다. 길을 걷다보면 그냥 휑하니 텅 빈 공간으로 접어들게 되고, 또 아무렇게나 걷다보면 밀집된 자연 경관으로 된 공원으로 접어들 수 있어야 한다.
가능한 한 실용성이 배제된 밀림으로서의 공원과 사막으로서의 광장이 적어도 도시 공간 전체의 3분의 1은 차지해야 한다. 실용성의 체계는 곧 도시적인 명령 체계의 다른 이름이다. 몸 가는 데 마음 간다고 했다. 멀리 변산 반도에서 실험학교를 꾸리고 있는 윤구병 선생의 말이다. 아무런 실용성도 없는 밀림과 사막으로 쉽게 접근하고 쉽게 들어설 수 있고 쉽게 거닐 수 있는 반도시적인 도시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시도 나오고 예술도 나온다. 시와 예술은 전혀 실용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5. 몸을 자연적인 쪽으로 확장해야 한다.

그러고 보면 전혀 실용적이지 못한 몸의 자연적인 운동을 통해 몸이 확장될 때, 거기에는 자연으로 되돌아 간 몸이 있고 그에 따른 새로운 몸 운동의 무한한 가능성들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3. 그 외 여러 이야기들이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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