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를로-퐁티의 몸 현상학
메를로-퐁티의 몸 현상학
조광제(철학, 철학아카데미 공동대표)
1. 메를로-퐁티의 생애와 사상의 개관
메를로-퐁티는 사르트르보다 3년 늦은 1908년 유복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1930년 프랑스의 인문학적 천재들을 배출한 파리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합니다. 그가 사르트르를 만난 것은 이 곳에서인데, 이 만남은 프랑스 지성계를 장식한 두 스타 간의 다행과 불행을 동시에 선사하는 계기가 됩니다. 대학을 졸업한 1930년대의 메를로-퐁티는 여러 중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습니다. 이 때 그는 레비-스트로스와 사르트르의 부인인 보봐르를 사귀고, 고등연구원에서 프랑스에 헤겔 철학을 뿌리내리게 한 것으로 유명한 코제브(Alexandre Koèjve: 1902-1968)의 강의를 들으면서 아롱(R. Aron), 바타이유(G. Bataille), 라캉(J. Lacan) 등과 사귀게 됩니다. 이 때 메를로-퐁티는 아직 정확하게 현상학적이라 말할 수 없는 그의 첫 주저 『행동의 구조』를 1938년에 마무리짓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는 이미 현상학적인 태도 즉 실증주의적인 과학주의를 철저하게 비판하고, 그것과 짝지어져 있는 칸트의 순수 이성비판의 작업을 혹심하게 비판하면서 기존의 전통 철학에서 벗어나고 있습니다.
1939년과 1940년 사이에 보병 근무를 하면서 메를로-퐁티는 레지스탕스의 비밀 단체인 <사회주의와 자유>를 통해 사르트르와 접촉하고, 그런 가운데 사르트르와는 다른 방식으로 하이데거와 후설의 현상학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1944년에 벨기에 루뱅에서 파리로 전송된 후설의 유고들을 점검하면서 작업한 끝에 1945년 500여 쪽에 달하는 『지각의 현상학』을 완성하게 되죠. 이로써 그는 가장 천재적이고 독특한 현상학자로서 자리잡게 됩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전쟁이 끝난 후 메를로-퐁티의 사상은 주로 정치 사상적인 방향으로 선회하게 됩니다. 그의 입장은 현상학과 당시의 주된 분위기였던 마르크스주의를 결합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입장의 정치 사상은 1947년 당시 소련의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휴머니즘과 테러』를 출간함으로써 한 단계 정리됩니다. 그러면서 그는 사르트르와 함께 정치부 주임 기자로서 사회 평론지인 <현대>(les temps modernes)를 이끌어가면서 정치 평론과 예술 평론에 관한 글들을 싣게 되고 이를 모아 1948년에 『의미와 무의미』를 출간하게 되죠.
그러던 중 1950년 우리 나라의 6.25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오랜 정치적 반목 끝에 메를로-퐁티는 1952년 <현대>지 일을 그만 두면서, 사르트르뿐만 아니라 소련의 스탈린주의와 결별하게 됩니다. 메를로-퐁티는 사회주의 국가가 침략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입장에서 스탈린을 비판한 반면, 사르트르는 계속해서 스탈린을 옹호했던 것이 두 사람이 결별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라 하겠습니다. 그 외 두 사람 간에 감정적인 반목의 골도 많이 작용한 듯 합니다. 메를로-퐁티는 그 이후 소련의 사회주의를 비판하면서 그 전에 그가 썼던 『휴머니즘과 테러』의 입장을 후회하게 되고, 1955년 『변증법의 모험』을 쓰기까지 7년간 거의 절필하다시피 하면서 일체의 글을 발표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니까 『변증법의 모험』은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자이긴 하나 종전과는 달리 사르트르의 입장을 거세게 비판하면서 새롭게 정립된 메를로-퐁티의 정치 사상을 담고 있다 하겠습니다.
메를로-퐁티는 1961년 뜻하지 않은 심장병으로 53세를 일기로 갑자기 세상을 떠납니다. 50년대에 들어서서 사실 메를로-퐁티는 『행동의 구조』와 『지각의 현상학』의 작업, 즉 인간과 세계가 탄생하는 원초적인 지각의 장을 드러낸 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원초적인 지각의 장에서 어떻게 인간적인 질서의 상징과 예술과 언어의 세계가 열리는가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에 비록 완성되지 못하고 포기되긴 했지만 『세계의 산문(散文)』에서 ‘승화’(昇華) 개념을 통해 상징과 언어에로의 길을 모색하기도 했고, 생전에는 발간되지 못했지만 그의 연구 비망록과 초고들을 모아 유고집으로 발간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세계의 살’(la chair)을 바탕으로 인간 중심주의를 완전히 벗어버린 새로운 존재론을 미완성인 채로 펼치고 있습니다. 메를로-퐁티의 갑작스런 죽음은 그의 사상이 한참 여러 방향으로 만개하고 있을 때에 찾아 왔습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신이 그의 천재성을 질투한 나머지 갑자기 그를 데려갔다고들 했다 합니다. 이는 그의 철학을 전체적으로 꿰뚫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 글에서는 특히 『지각 현상학』을 정점으로 하는 그의 초기 사상을 중심으로 그의 현상학적인 인식론 내지는 존재론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의 후기 사상에 대해서는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의 일부인 ⌈교직-교차⌋와 『눈과 정신』에 대한 해설에서 일별해 볼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2. 메를로-퐁티 전기 몸 현상학의 세 주요 개념: 몸, 지각 그리고 세계
1) 절대적 정신의 폐기
메를로-퐁티 전기의 몸 현상학을 이루는 핵심 개념은 대략 세 가지를 꼽을 수 있습니다: 몸, 지각 그리고 세계가 그것입니다. 위대한 철학자들이 다 그러하듯이 메를로-퐁티 역시 자기 나름의 독특한 문제 의식에서 철학을 펼칩니다. 메를로-퐁티는 근대 철학사를 꿰뚫고 내려 온 정신의 절대화를 근원적으로 비판하고자 합니다. 정신을 절대화시키면 정신 내적인 세계가 우리가 살아가는 바깥의 실제 세계보다 더 참다운 세계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리고 정신의 능력에 의해 이론적으로 구성된 세계를 우리가 직접 체험하며 살아가는 이 구체적인 세계보다 더 참다운 세계라고 말하게 됩니다. 물론 이런 정신 위주의 세계관 내지는 인간관이 우리를 더 잘 위로해 줄지 모르겠습니다. 구체적인 세계 속에 ‘거추장스러운’ 몸은 지니고 사는 것이 얼마나 피곤한 일이며, 또 급기야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이 몸은 얼마나 허망한 것이냐는 거죠. 그럴 때 우리 인간이란 다른 모든 사물들이나 동식물들과는 달리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정신을 토대로 해서 사는 것이라고 하면 우리는 약간의 희망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메를로-퐁티는 미끼처럼 희망을 던져주는 철학을 원하지 않습니다. 주어진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정면으로 삶을 돌파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길이라 여깁니다. 이를 위해 메를로-퐁티는 그 동안 철학적인 탐구 영역으로 정식화되지 못한 영역을 붙잡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각 세계, 즉 우리가 온 몸으로 또는 몸의 각 기관들로써 만나고 체험하는 구체적인 세계를 가장 중요한 철학 탐구의 영역으로 정식화하는 작업입니다. 물론 이는 후설의 ‘생활 세계’ 또는 하이데거의 ‘세계’를 더 강력하게 밀고 나감으로써 성립되는 작업입니다.
2) 인간의 정신은 아메바의 위족
메를로-퐁티가 이 지각 세계의 영역을 가장 근원적인 철학 탐구의 영역으로 정식화하면서 함께 드러나는 그의 철학적 접근은 당연히 ‘겸손’합니다. 인간 정신의 절대적인 우월성을 포기한 메를로-퐁티는 우선 인간이 어떻게 이 세계를 체험하고 살아가는가를 다른 유기체들과 같은 차원에서 탐색합니다. 그래서 메를로-퐁티의 첫 주저인 『행동의 구조』는 인간 행동의 구조뿐만 아니라 이를 탐구하기 위한 유비적(類比的)인 기초로서 아메바, 잉어, 닭, 침팬지 등의 행동의 구조를 탐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메를로-퐁티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명을 지닌 유기체들의 존재 방식을 아울러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에 우리는 “아메바와 인간의 같은 점은 무엇일까?”라는 다소 생경한 물음을 통해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 철학의 기초를 파 들어가 볼 수 있습니다.
아메바나 인간은 생물학으로 보면 모두 하나의 생물종(生物種)이죠. 생물은 당연히 자신의 환경을 갖습니다. 생물이 자신의 환경을 갖는다는 말은, 죽어 있는 사물들에게는 주위의 다른 것들과 투쟁하고 화합한다는 것이 별 의미가 없는 반면, 생물들이 주위의 다른 것들과 투쟁하고 화합한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철학적인 분위기를 내면서 환경을 세계 또는 환경 세계라고 표현해 봅시다.
생물종인 아메바와 인간은 각각 나름의 독특한 기능을 갖고서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 세계와 투쟁하고 화합합니다. 아메바는 주위의 환경이 자신의 생존에 불리할 때 그 곳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 하죠. 그때 발도 다리도 날개도 지느러미도 없는 아메바는 어떻게 합니까? 움직여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몸을 길쭉하게 만들어 끝을 고정하고는 나머지 몸을 그 끝을 향해 모읍니다. 거기서 또 자신의 몸을 길쭉하게 늘어뜨려 끝을 고정한 후 다시 몸을 그곳으로 모으는 방식으로 움직여 가죠. 이러한 아메바의 몸-다리 기능을 우리는 위족(僞足) 기능이라고 합니다.
인간도 아메바의 위족과 같은 기능을 발휘합니다. 인간에게 아메바의 위족처럼 몸 속에서 나왔다 다시 몸 속으로 들어가는 독특한 기능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생리학적으로 보면, 인간의 바깥 몸에서 아메바처럼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할 수 있는 것은 생식기밖에 없습니다. 성적인 흥분이 온몸을 휘감으면 생식기가 부풀어 오르죠. 남녀 모두 마찬가집니다. 원초적인 생물종인 아메바의 위족 기능이 인간의 생식기에서 마치 흔적 기관처럼 발현되는 셈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서 아메바의 위족 기능이 몸 전체로 확산되어 살아 오르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정신의 발현입니다.
인간은 환경이 자신의 실존을 실현하는 데 불리할 경우에는 마치 아메바가 몸을 늘어뜨려 길쭉하게 위족을 만들어 내듯이 자신의 몸을 ‘늘어뜨려’ 정신을 만들어 냅니다.(여기서 실존은 생물학적인 실존과 아울러 문화적인 실존 모두를 포함합니다. 메를로-퐁티 철학에서 실존은 인간이 환경 세계 혹은 세계가 요구하는 사항을 충족시킴으로써 실현됩니다. 물론 이 때 인간이 맞닥뜨리는 세계는 다른 인간들이 사회・역사적으로 형성해 온 복합적인 의미의 세계를 말합니다.) 그리고는 “아니, 도대체 왜 이렇게 일이 안 풀리지?”, “저 사람이 나에게 그 말을 한 까닭이 무엇이지?”, “사과가 다 익어 나무에서 떨어지는 까닭은 무엇이지?”, “도대체 이 광막한 우주에서 먼지 같은 인간의 삶이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하는 식의 물음을 던집니다. 그런 물음을 던지는 데에는 물론 사유와 반성이 깔려 있죠. ‘정신-사유-반성’은 인간이 독특하게 일구어 온 생물종으로서의 독자적인 기능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체화된 의식은 몸
메를로-퐁티는 이러한 인간의 생물종으로서의 독특한 기능과 그에 따라 형성되는 온갖 일들이 발생하는 원천을 캐고자 합니다. 메를로-퐁티가 생각하는 원천은 인간이 ‘정신-사유-반성’의 기능이 ‘솟구쳐 오르기’ 전, 말하자면 그러한 기능이 아직 발현되지 않고 몸 속에 ‘녹아 있을’ 바로 그때의 몸입니다. 이 몸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온갖 정신적 활동이 말 그대로 ‘녹아 있는’ 혹은 ‘배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결코 단순한 기계적인 물질일 수가 없습니다. 그때 몸은 방식만 다를 뿐 흔히 우리가 말하는 정신적인 기능을 함께 수행하는 몸이지요. 그러나 정신이 있고 몸이 있다가 이윽고 둘이 만나 정신이 몸 속에 용해되거나 배어드는 것으로 보면 안 됩니다. 원래 인간의 몸에는 정신적인 힘 또는 의식적인 힘이 배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메를로-퐁티는 ‘체화된 의식’(conscience incarnée)이라 합니다. 그러고 보면 ‘체화된 의식’은 말과는 달리 기실 의식이 아니라 몸입니다.
한창 공을 주고받으면서 테니스 경기를 하는 이형택을 생각해 봅시다. 그는 ‘지금 공이 저렇게 오고 있으니까 나는 저쪽으로 시속 몇 킬로미터로 달려가서 어떤 자세로 공을 쳐야지’하고 생각하면서 공을 칩니까? 결코 그렇지 않죠. 순간순간 몸 자체가 전체 상황에 맞추어 미처 생각도 하기 전에 기가 막히게 공을 쳐 내는 것이죠. 자동차 운전을 오래 한 사람들은 심지어 눈으로 보지 않은 것 같은 위험한 상황을 기가 막히게 모면해 낸 경험들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죠. 말하자면 몸이 ‘생각하는’ 것이죠. 여기서 우리는 ‘생각하는 몸’의 모습을 찾아 낸 셈이다. 밥을 맛있게 먹을 때, 자전거를 탈 때, 수영을 할 때, 악기를 연주할 때 우리는 매순간 ‘어떻게 해야지’ 하고 반성해서 생각하고 그렇게 생각한 내용을 몸에다 명령해 동작하도록 하지 않습니다. 몸이 이미 그렇게 움직이고 있죠. 이미 그렇게 주어진 환경 세계의 요구 사항에 맞추어 우리 몸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지요. 이때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렇게 한다고도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런 생각도 없이’라는 말은 뚜렷한 반성적인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일 뿐 이른바 ‘몸이 하는 생각’마저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몸이 하는 생각을 이미 한 것입니다.
이같이 정신이 몸에서 융기(隆起)하기 전에 몸이 하는 기능을 메를로-퐁티는 몸의 원초적 기능이라고 합니다. 이 말에는 정신적인 반성에 의한 생각은 이차적인 기능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메를로-퐁티는 원초적인 몸의 기능을 제대로 철학의 대상으로 삼은 첫 번째 철학자인 셈입니다. 그러고 보면 메를로-퐁티 철학의 기획은 처음부터 특수한 영역을 붙잡아 자신의 철학 작업의 토대로 삼은 셈입니다.
우리는 우리에 대해 존재하고 공간, 대상 혹은 도구를 맡아 다룬다. 이러한 일은 원초적인 기능에 의해 가능하다. 그리고 그 원초적인 기능을 독점해서 수행하는 장소는 몸이다. 내가 항상 견지하는 목표는 이 원초적인 기능을 밝히고 이 몸을 기술하는 것이다.(『지각』)
여기서 우리는 메를로-퐁티가 자신의 작업을 어떻게 규정하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원초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몸을 기술하겠다는 점에서 우리는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을 ‘몸 현상학’이라 부르게 됩니다. 현상학의 특징 중 하나는 인과적인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대로 ‘기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에 대해 존재하고 공간, 대상 혹은 도구를 맡아 다루는’ 원초적 기능이란 다름 아니라 우리와 세계와의 관계를 설립하는 기능을 말합니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 반성을 할 수 있고, 또 환경 세계의 뭇 구성 요소들을 다룹니다. 이런 기능을 원초적인 기능이라 하고 더불어 주체적인 기능이라 한다면, 이 원초적이고 주체적인 기능을 독점적으로 수행하는 장소를 몸이라고 말하는 메를로-퐁티의 입장은 가히 몸 철학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몸이 이런 원초적이고 주체적인 기능을 독점하면서 주도적으로 상대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환경 세계, 간단하게 말해 세계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몸이 세계를 상대해서 발휘하는 원초적인 기능 중 원초적인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지각입니다. 지각은 몸과 마찬가지로 메를로-퐁티가 전통 철학의 허(虛)를 파고 들면서 공격해 들어가는 중요한 무기입니다. ‘몸, 지각 그리고 세계’, 이것이 메를로-퐁티의 철학이 맴도는 원초적인 영역입니다. 메를로-퐁티는 이 원초적인 영역에서 이전 철학들이 만들어 낸 온갖 근본적인 이원(二元)의 대립들, 예를 들어 유물론과 생기론의 대립, 관념론과 실재론의 대립, 즉자(卽者)와 대자(對者)의 대립, 기계론과 목적론의 대립 등을 파괴하고 극복하려 합니다.
3 세계의 선여성.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에서 전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몸을 통해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이미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세계의 기존재성(旣存在性)을 전제하고 있다고 해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론적인 요청상 그렇게 시작한다고 보면 안 됩니다. 당연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존재하지 않고서는 이 몸이 살 수 있는 장소가 없고, 따라서 만약 이미 세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생각하는 우리의 몸’은 그 자체 ‘둥근 사각형’처럼 완전히 모순적인 상황에 빠지고 맙니다.
메를로-퐁티가 철학 공부를 하고 있을 당시 유럽은 현상학의 거센 흐름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현상학은 앞서 말했다시피 후설에서 시작됩니다. 후설의 세계 이해를 다시 상설(詳說)해 봅시다. 후설 현상학에서 참다운 세계의 모습은 의식 체험에 떠오르는 세계의 모습입니다. 앞서 말한 것에 빗대 보면, 그 때 세계는 절대적인 의식 주체가 부여하는 각종 의미들로 구성되는 것입니다. 크게 보면 이는 칸트나 헤겔의 주장과 유사합니다. 인간의 정신적인 주체가 세계를 구성함으로써 비로소 인간이 세계를 갖는다는 것이죠. 이럴 경우, 당연히 우리는 회의에 빠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이미 구체적으로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 세계가 인간의 정신적인 주체의 구성 작용에 의해 비로소 이렇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인간의 정신적인 주체의 구성 작용은 도대체 ‘어디에서’ 이루어진 것이란 말인가, 결국은 이 세계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그래서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하이데거는 그의 스승 후설의 생각을 되받아치게 되고 ‘세계-내-존재’로서의 인간 주체를 전면에 내놓았던 것이지요. 하지만 하이데거는 진정한 인간 존재의 모습인 실존은 이 세계와의 구체적인 관련을 완전히 벗어버린 데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봅니다. 즉 죽음이 열어 주는 무를 자기 존재의 토대로 받아들임으로써만 실존을 획득할 수 있다고 함으로써 마치 지붕 위에 올라가기 위해 사닥다리를 사용하고서는 그 사닥다리를 차버리듯 세계를 이용하고서는 차버립니다. 하이데거는 결국 전신(全身)으로 우리를 압도해 오는 구체적이고 진정한 세계를 저버리고 만 셈입니다.
그러나 메를로-퐁티는 우리를 압도해 오는 구체적이고 진정한 세계가 진리의 원천임을 발견하고, 세계로부터 분리되기도 하고 하나가 되기도 하는 인간의 몸이 급기야 세계와 완전히 하나가 될 때 진정한 인간적 실존을 이룬다고 봅니다. 메를로-퐁티는 자신의 철학적 사고로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오묘함이 세계 속에 있음을 인정하고 그 오묘한 세계 앞에서 철학적 사고의 무능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세계는 무진장하다. <세계가 있다.> 혹은 오히려 <그 세계가 있다.>라는 명제는 일생 동안 나에게 던져져 있다. 나는 이 명제를 결코 완전히 해명할 수 없다.(『지각』)
이렇듯 메를로-퐁티가 세계의 기존재성과 진리성을 바탕으로 삼는다는 것은 그 어떠한 인간의 이론적인 작업도 이를 부정하거나 거부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곧바로 자신의 모태를 부정하고 죽이는 자기 모순적인 짓임을 폭로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드는 것이 과학입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몸에서 이루어지는데도 따라서 이 세계 속에서 이루어지는데도 마치 그 곳을 온전히 빠져나와 정확한 객관적인 거리를 가짐으로써 참다운 진리에 도달한 양 위세를 떨치는 과학주의적인 정신의 오만함을 질타합니다.
사물들 자체에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지식이 항상 그것에 대해 말하는 ‘지식 이전의 이 세계’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 세계에 대한 모든 과학적인 규정들은 세계에 비하면 추상적인 기호에 불과하고 의존적이다. (…) 세계는 지식에 의해 소유되기 이전에 이미 형성된 혹은 이미 거기에 있는 것으로 체험된다. (…) 이미 존재하는 유일한 로고스는 세계 자체이다.(『지각』)
그렇다면, 도대체 메를로-퐁티의 철학적 눈에 비친 세계의 모습이 어떠하기에 그는 세계를 마치 신을 숭배하듯 하는 걸까요? 메를로-퐁티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몸을 포함한 세계를 바라봅니다. 결론을 미리 가져 와 말하면, 메를로-퐁티가 보는 세계는 인간의 몸을 중심으로 유기적으로 하나가 되어 ‘서로 정보를 주고받는’ 또 하나의 거대한 몸입니다. 그래서 메를로-퐁티가 보는 세계는 몸의 구성 체계와 대응한 구성 체계를 갖습니다. 메를로-퐁티는 몸을 물리적 질서, 생명적 질서, 인간적 질서 등 세 가지 질서로 나눕니다. 여기서 인간적인 질서는 다른 말로 사회-문화적인 질서라 달리 부를 수 있다. 이 세 가지 질서가 변증법적으로 통일되어 하나의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여기서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변증법은 물리적인 질서, 생명적인 질서, 인간적인 질서 각각이 부분처럼 모여 전체인 하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 세 가지가 하나로 통일되어 있고 그런 뒤에 이 통일된 전체를 바탕으로 각각의 질서가 의미 있게 나타난다는 것을 뜻합니다.) 마찬가지로 세계 역시 이 세 가지 질서가 변증법적으로 하나로 통일되어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까닭은 세 가지 질서를 갖춘 몸이 세계 속에 있어 세계의 핵심 부분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세계와 거리를 가지면서 세계를 향해 가는 이중적인 방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세계 쪽에서 보면, 세계가 몸을 포섭해서 몸을 자신의 구성 원리로 삼으면서 동시에 몸을 놓쳐 다시 몸을 포섭하기 위해 힘써야 하는 이중적인 방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4. 세계에의 존재인 몸
메를로-퐁티가 이미 존재하는 세계와 그 속에서 작용을 주고 받는 몸과의 관계를 가장 잘 나타내는 개념은 ‘세계에의 존재’(être-au-monde)인 몸입니다. 그가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의 몸 철학의 구도에서 보면 여기에서 우리는 ‘몸에의 존재’(être-au-corps)인 세계를 더불어 운위할 수 있습니다. 메를로-퐁티가 몸과 세계와의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는 ‘세계에의 존재’라는 개념은 물론 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를 응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세계에의 존재’는 몸과 세계 혹은 세계와 몸이 서로 구조를 교환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또 바로 그런 교환 관계 즉 ‘세계에의 존재’에서 내가 진정한 실존을 확보한다고 봅니다. 즉 메를로-퐁티는 우리 몸 속에 들어 와 있는 세계, 우리가 몸을 통해 그 속으로 진입해 들어가는 세계 속에서 인간이 자신의 실존을 확보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나의 실존의 가능성을 세계를 넘어선 죽음, 죽음이 현시하는 무(無)와의 관련에서 찾고 있죠. 이름은 비슷할지 모르지만 메를로-퐁티의 ‘세계에의 존재’와 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는 이렇듯 그 귀결점이 사뭇 다른 것입니다.
메를로-퐁티에서 ‘세계에의 존재’인 몸은 세계 속에 있으면서 세계와 하나가 되기 위해 세계를 향해 가는 방식으로 존재함을 일컫습니다. 몸이 세계 속에 존재한다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해하는 데 별달리 어려울 게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몸이 세계 속에 있다고 해서 상자 속에 구슬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닙니다. 왜냐 하면, 몸이 세계 속에 있다는 것이 세계를 향해 가는 것과 별개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몸이 세계 속에 있다는 것은 세계에 의해 몸이 일정하게 영향을 받아 구조화되고 형태화됨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역시 철학에서는 쉬운 것이 없는가 봅니다. 이를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합시다.
1) 몸의 습관, 몸의 구조화, 몸틀, 몸의 탁월한 가소성
몸이 ‘세계에의 존재’라는 존재 방식을 띠는 데에 일차적인 계기가 되는 것은 몸이 세계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메를로-퐁티는 몸이 세계 속에 있다는 것을 다른 말로 “몸이 세계에 거주한다.”고 말합니다. 거주한다는 것은 친숙함을 특징으로 하죠. 몸은 세계에 친숙함을 느끼면서 그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안온한 집에서 거주하듯이 말입니다. 물론 이런 메를로-퐁티의 이야기는 하이데거의 ‘내존재’(In-sein)에 대한 분석과 거의 대동소이합니다. 그런데 이를 증시하는 방법이 전혀 다릅니다. 메를로-퐁티는 몸이 혹은 우리가 세계 혹은 세계 속의 사물들과 친숙하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보이기 위해 메스칼린이라는 향 정신성 의약제의 실험을 보입니다.
메스칼린이라는 약제를 몸에 주입하면 이상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방 안에서 평소 친숙하게 사용하던 재떨이, 만년필, 책상과 의자 등은 가까이 있는데 평소 주의를 기울이지 않던 천정, 벽 등은 한없이 멀어져 방이 축구 운동장만해지고 그 외의 것들은 평소 친숙하게 여긴 정도에 따라 그 축구 운동장만한 방안에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실제로 지각됩니다. 말하자면 평소 일상생활 속에서는 그저 객관적인 거리 감각으로 지각되던 것들이 메스칼린이라는 약을 먹으면 평소 느끼던 친숙함의 정도에 따라 실제 거리가 다르게 지각되는 것입니다. 몸이 세계 속에 있다는 것 즉 몸이 세계 속에 거주한다는 것은 이와 같이 친숙함의 정도에 따라 세계 속에 더 깊이 더 진하게 편입되어 사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몸이 세계에 대해 친숙함을 느끼는 것이 그저 우연하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뭔가 세계가 몸에 작용을 가하고 그 작용의 결과 몸에 구비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친숙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살아 온 자연적 환경 내지는 사회 문화적인 환경이 어떠한가에 따라 우리는 사뭇 다른 상대적인 삶의 방식을 취합니다. 일본 사람들이 화날 때 오히려 미소를 짓는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쉽게 이해될 수 없습니다. ‘뼈대 있는’ 가문에서 자란 사람들의 몸가짐과 ‘개방적인’ 가문에서 자란 사람들의 몸가짐은 많이 다릅니다. 이에 관해서는 온갖 예들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아주 특이한 예를 하나 더 들자면, 똑 같은 길이의 직선을 수평적으로 놓을 때보다 수직적으로 놓을 때 더 크게 보이는 착시가 일어난다고 말하지요. 그런데 그것은 도시 지역에서 살아 온 사람들의 이야기지 밀림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착시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계 속에 있다는 것이 세계의 힘과 아무런 관계없이 상자 속에 구슬이 있듯 한 건 아닌 거죠. 몸이 세계가 가하는 여러 작용들을 받아 그것에 적응하려 하고, 그 과정에서 세계에 대한 경험들이 일종의 유형으로서 몸에 형태지워지는 것입니다. 이른 메를로-퐁티는 세계가 몸을 구조화한다고 말합니다. 이를 좀 더 쉽게 설명해 봅시다.
세계 속에 사는 몸이 그 세계 속에서 세계와 친숙하게 잘 살기 위해서는 순간순간 혹은 장기적으로 세계가 자기에게 부과하는 과제를 잘 해결해야 합니다. 길을 잘 걸어가야 하고, 밥을 잘 먹어 영양을 섭취해야 하고, 버스를 타고 문제없이 학교에도 가야하고, 사람들과 만나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혹은 종교적인 각종 사회- 문화적인 행동도 잘 해야 합니다. 그런 것들이 물론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럴 때 몸(인간)은 일일이 순간순간의 상황에 일정한 대응 방식도 없이 그야말로 ‘맨몸’으로 대처하지는 않죠. 몸은 주어지는 상황과 그 상황의 형태에 따라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는 일반적인 형태들을 지녀야 하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매 상황마다 몸이 일일이 처음으로 그 상황을 대하듯 낯설어 하고 힘들어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형태들은 몸이 태어날 때부터 타고 나는 것입니까, 아니면 세계 속에 살다 보니 획득하게 된 일종의 습관과 같은 것입니까? 물론 일종이 습관과 같은 것이지요.
그래서 메를로-퐁티는 몸이 세계와 하나가 되기 위해 적응하는 과정에서 세계로부터 일정한 형태를 받아들여 자기 속에 구조화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미 구조화된 형태들에 따라 우리가 지각하고 행동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마치 구조주의에서 말(la parole)과 언어 체계(la langue)를 구분하고 순간순간 하는 말이 언어라는 구조 체계에 의거해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몸의 순간순간의 행동과 지각이 말에 대응되고, 몸에 이미 구조화된 형태가 언어 체계에 대응되는 셈입니다. 흔히 구조주의는 현상학의 주체 철학에 반기를 들고 나타난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런 대목을 통해 우리는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이 현상학으로부터의 출구와 구조주의에의 입구에 각각 한 발씩을 걸쳐 놓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메를로-퐁티는 소쉬르의 구조주의적 언어학을 프랑스에서 가장 먼저 연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무튼 몸이 세계가 요구하는 과제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한 과정에서 어떻게 세계에 의해 구조화되는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예컨대 우리가 누군가가 피아노 연주를 제대로 잘 한다고 할 때 그 피아니스트는 어떤 경지에 오른 것입니까? 우리는 어떤 한 가지 악보에만 능한 사람을 뛰어난 피아니스트라 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어떤 종류의 악보를 들이대더라도 어느 정도 시간만 지나고 나면 잘 연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제대로된 피아니스트는 어떤 피아노 악보라도 연주할 수 있는, 복잡하지만 일정한 체계적인 형태를 자신의 몸 전체에 구조화해서 갖춘 사람이라는 것이죠. 말하자면, 그(혹은 그녀)는 피아노 연주를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몸이 구조화되어 있는 것이죠. 우리말식으로 하면, 그(혹은 그녀)에는 피아노 연주법이 몸에 밴 것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정치를 잘 하는 사람은 정치를 잘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몸이 구조화되어 있고, 경제를 잘 일구는 사람은 경제를 잘 일구는 방식으로 몸이 구조화되어 있다 하겠습니다. 물론 그렇게 구조화된 몸의 형태는 기본적으로는 물리적인 질서, 생명의 질서, 인간의 질서 등으로 크게 나눌 수 있지만, 얼마든지 여러 수준으로 또 여러 방식으로 더 세분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의 몸은 미세한 세계에 의해 미세하게 구조화되고, 또 그래야만 이 미세한 세계를 잘 살아 갈 수 있는 법이지요. 이렇게 보면, 그 어떤 다른 동물의 몸보다 인간의 몸이야말로 여러 미세한 형태들에 의해 다양하게 변형될 수 있고, 그 다양한 형태들을 동시에 지닐 수 있는 아주 뛰어난 가소적(可塑的 plastique) 존재라 하겠습니다. 또 그렇기 때문에 몸은 세계 속에 무진장하게 들어 있는 가능성들이 현실화되는 장소가 되고, 바로 그럼으로써 다기능적인 세계 속에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몸틀, 몸의 통작용, 감각-운동적 아프리오리
그런데 이처럼 몸 속에 구조화되고 구조화되어 있는 형태들은 근세 합리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태어날 때부터 갖는 본유 관념이나 칸트가 말하는 형식적인 지성의 범주가 아니지요. 또한 경험론자들이 말하는 바 몸과 무관한 관념들의 연합 법칙들도 아닙니다. 지각되는 세계의 구체적인 상황들을 구조화한다는 점에서는 경험 이전의 것이지만, 세계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획득된다는 점에서는 실질적인 것입니다. 요컨대 어려운 철학적인 용어로는 ‘실질적(實質的)인 선험성(先驗性)’을 띠는 바 ‘감각-운동적인 아프리오리’입니다.
이것의 의미를 제대로 밝히기 위해서는 몸이 ‘세계에의 존재’라는 존재 방식을 띠는 데에 관련되는 또 다른 하나의 계기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몸이 세계를 구조화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몸이 세계와 하나가 되기 위해 세계를 향해 어떻게 나아가는가를 말합니다. 물론 이 관계는 몸이 세계 속에 있다는 관계를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지죠. 흔히 인간을 제외한 동식물들은 환경이 자기에게 맞지 않으면 자기를 그 환경에 맞도록 바꾸거나 그것마저 안 되면 그 환경을 떠나고 말지만, 인간은 환경이 자기에게 맞지 않으면 그 환경을 바꾼다고들 말합니다. 몸이 세계와 하나가 되기 위해 세계를 향해 나아갈 때에 몸은 가능한 한 자기가 친숙하게 거주할 수 있는 방향으로 세계를 바꿉니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세계가 요구하는 대로 몸이 자신의 구조를 바꾸기도 합니다.
우선 몸은 여러 감각 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갖가지 방식의 세계의 모습을 자기 속에서 하나로 통일합니다. 예컨대 눈을 감고 검지의 오른쪽 면과 중지의 왼쪽 면 사이에 연필을 끼면 연필이 하나로 느껴지지만, 눈을 감고 중지를 검지 위에 겹쳐 교차되게 하고 중지의 오른쪽 면과 검지의 왼쪽 면 사이에 연필을 끼면 연필이 두 개로 지각됩니다. 중지의 왼쪽 면과 검지의 오른쪽 면 사이에는 대상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구조가 형성되어 있지만, 중지의 오른쪽 면과 검지의 왼쪽 면 사이에는 대상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구조가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을 볼 때 눈으로 들어오는 시각적인 풍경과 귀로 들어 오는 청각적인 음율과 피부와 근육으로 느껴지는 촉각적인 접촉 내용이 하나로 통일되지 않고 마치 중지의 오른쪽 면과 검지의 왼쪽 면 사이에 끼인 연필이 두 개로 느껴지는 것처럼 각각 ‘따로 노는 것’으로 지각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살고 있는 친숙한 세계는 혼란되어 송두리채 무너지고 어쩌면 우리는 정신착란에 시달리게 될지 모릅니다.
세계가 하나라는 것은 몸이 그 같이 세계를 하나로 통일시켜 지각하도록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세계가 하나라는 것은 관념론의 주장처럼 온갖 다양한 혼란한 감각들이 감성에 먼저 주어지고 뒤이어 이를 지성이 종합하고 파악함으로써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이미 몸에서 단적으로 이루어지고 지각되는 것입니다. 또한 세계가 바로 이렇게 지각되는 것은 구조적으로 볼 때, 몸이 세계를 그렇게 구조화하기 때문입니다. 몸이 그렇게 세계를 하나가 되게 구조화하는 능력을 메를로-퐁티는 ‘몸틀(shema corporel)’이라 합니다.
메를로-퐁티는 이러한 자기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여러 재미있는 실험을 제시합니다. 그 중에 아주 신기한 것 하나를 소개합니다. 몸이 어떻게 지각되는 공간 구조를 일구어 내는가를 보이는 실험이 있습니다. 일 부러 그렇게 되도록 광학 기술을 이용해 만든 어떤 안경이 있는데, 이 안경을 쓰면 갑자기 세상이 180도 거꾸로 보인다. 그런데 이 안경을 계속 쓰고서 둘째 날이 되면 자기 몸이 물구나무 서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고, 셋째 날에서 일곱째 날을 거치면서 점점 몸이 바로 서고 보름이 지나면 완전히 전체 세상이 완전히 정상적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태로 며칠을 지나고 난 뒤 안경을 벗으면 이게 왠 일일까요? 안경을 쓰지 않았는데도 세상이 180도 거꾸로 보입니다. 앞의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약 보름이 지나야만 세상이 완전히 정상적으로 보인다.
몸은 외부 환경 세계(안경을 포함한)과 자기가 친숙하지 않은 경우, 그 환경 세계를 자기에게 친숙한 방식으로 바꾸어 지각한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또 이는 위 혹은 아래라는 공간 방향의 설정 즉 공간 구조가 근본적으로 몸에 의해 조정되고 규정된 것임을 일러 줍니다. 이같이 몸은 근본적으로 세계를 지금 우리가 지각하는 세계로 만들어 제공합니다. 세계 쪽에서 보면, 지금 우리가 그 속에 거주해 살고 있는 이 지각된 세계는 한편으로 우리의 몸이 그렇게 지각되도록 한 바탕 위에서 성립됩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지각하고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몸과 하나를 이룰 수 있도록 몸에 의해 구조화된다 하겠습니다. 몸이 세계와 하나를 이루기 위해 세계에게로 나아갈 때, 반대편에서는 세계가 몸과 하나를 이루기 위해 몸에게로 다가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같이 몸이 세계를 구조화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요? 정신적으로 경험과 무관하게 타고나는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세계를 구조화하는 대부분의 몸의 능력은 몸이 세계를 경험하면서 획득하게 된 습관적인 형태들에 의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경험적으로 획득해 자신 속에 갖추게 된 ‘실질적인 아프리오리’ 내지는 ‘감각-운동적인 아프리오리’들에 의해 몸이 그 같은 능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3) 몸과 세계가 하나가 되면서 빚어지는 거대한 몸
그러고 보면 몸과 세계는 서로 구조를 교환하는 쌍방 작용의 관계를 갖는다 하겠습니다. 이런 몸과 세계의 관계는 마치 메비우스의 띠처럼 안 쪽에서 출발해 가면 바깥쪽에 도달하게 되고, 바깥쪽에서 출발해 가면 안 쪽으로 도달하게 되는 묘한 관계입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몸과 세계를 고정된 것으로 놓아 둔 채 생각해서는 안 되겠지요. 몸과 세계가 끊임없이 서로 작용을 주고받으면서 발전해 가는 역동적인 과정을 생각해야 합니다. 세계에 의해 구조화된 몸이 그렇게 구조화된 자신의 형태로써 세계를 다시 구조화하고, 그렇게 구조화된 세계는 몸을 다시 구조화하는 과정이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거죠. 이에 몸과 세계는 메비우스 띠와 같은 모습으로 서로 구조를 교환하면서 서로 발전해 가는 관계를 갖는 것이다. 이 관계는, 메를로-퐁티의 전기 몸 철학이 후기 살 철학으로 발전하게 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의 모습을 이중화하면서(se doubler) 서로 교차 반복되어(chiasme) 교직(enterlacs)을 이루는 것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아무튼 여기에서 우리는 저 앞에서 메를로-퐁티가 보는 세계는 인간의 몸을 중심으로 유기적으로 하나가 되어 ‘서로 정보를 주고받는’ 또 하나의 거대한 몸이라고 말한 것이 무슨 뜻인가를 확인하게 됩니다.
5. 몸이 드러나는 현상의 장
이제까지 메를로-퐁티 철학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 철학적인 사고력을 약간이라도 겸비한 독자라면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질 것입니다: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세계는 지각된 세계가 아니냐, 그런데 지각되는 세계는 얼마든지 잘못될 수 있는 세계이지 않은가, 오히려 과학적인 지성에 의해 파악되는 세계만이 참된 세계가 아닌가? 그런데 앞서 잠시 지적한 것처럼, 메를로-퐁티는 지각되는 세계가 진짜 원초적인 참다운 세계이고 과학적인 지성에 의해 파악되는 세계는 정신에 의해 구성된 관념적인 세계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메를로-퐁티는 신랄한 실험 상황을 제시합니다.
캄캄한 방에 피험자(被驗者)를 의자에 앉혀 놓고 피험자 뒷벽에서 영사기 같은 장치로 피험자 앞 벽에 직경 10센티미터 정도의 빛을 비추면서 그 빛을 움직이면 피험자의 눈동자와 머리는 그 빛을 따라 움직이게 되겠지요. 이 때 피험자가 보게 되는, 그래서 피험자에게 자극을 주어 피험자의 눈동자와 머리를 움직이게 하는 그 빛은 물리학에서 말하는 빛인가요, 아니면 지각되는 빛인가요? 당연히 지각되는 빛입니다. 만약 지각되는 빛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물리적인 빛만이 존재한다고 말하게 되면, 이 피험자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의해 행동한 꼴이 됩니다.
이를 확대시키면 눈을 통해 지각되는 일체의 색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고 귀를 통해 들리는 소리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오로지 존재하는 것은 한번도 지각한 적이 없는, 과학적인 지성으로만 알 수 있는 빛의 진동이나 공기의 진동만이 있을 뿐입니다. 색과 소리가 없는 세계, 나아가 부드러움이나 딱딱함이 없는 세계를 우리는 진정으로 존재하는 세계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만약 그런 세계를 참다운 세계라고 하면, 우리의 일상생활은 완전히 신기루와 같은 헛것에 의해 이루어지는, 처음부터 거짓된 것이 되고 말지 않겠습니까.
메를로-퐁티는 이같이 몸으로 지각하는 세계 즉 몸으로 사는 세계를 이차적이고 파생된 것으로 보고, 오로지 과학적인 지성 즉 이성으로만 파악될 수 있고 지각될 수 없는 세계를 참다운 세계라고 여기는 과학주의적인 세계관을 ‘온 몸으로’ 비판합니다. 또한 그러한 과학주의적인 세계관을 떠받치는 철학을 아울러 비판합니다. 메를로-퐁티는 이러한 과학과 철학이 의존하고 있는 이성의 권리가 당연한 것이 아님을 폭로하고 그 지반을 드러냄으로써 이러한 비판을 수행하려 합니다. 물론 그 지반은 몸이 자신을 담고 있으면서 동시에 몸소 지각하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근본적인 철학은 자신을 절대적인 의식에 놓음으로써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의식 자체를 문제삼음으로써 성립한다. 또한 그것은 모든 지식을 해명함으로써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지식을 해명할 수 있다는 이성의 자만을 근본적인 철학적 문제로 재인식함으로써 성립된다.(『지각』)
철학의 가장 중요한 일은 객관적인 세계를 넘어서서 체험된 세계를 송환하는 것이다. (…) 내가 객관적인 세계의 편견을 넘어섬으로써 발견하고자 하는 것은 난해한 내적인 세계가 아니다. 우리는 세계에 대한 경험을 우리에게 나타나는 그대로, 우리가 우리의 몸에 의해 세계 속에 존재하면서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그대로, 우리가 세계를 우리의 몸으로써 지각하는 그대로 기술해야 한다. (『지각』)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지각 세계는 지성적인 반성 작업에 의해 이론적으로 분리되는 감각 세계와 개념 세계가 분리되기 이전의 세계입니다. 이 세계를 메를로-퐁티는 ‘우리가 살아내는 세계’ 혹은 ‘생생하게 체험된 세계’(le monde vécu)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근본적인 철학의 작업은 바로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데서 성립한다고 말합니다. 경험론(empirisme)은 모든 지식의 원천을 감각이라고 보고, 지성론(intellectualisme)은 모든 지식의 원천을 지성적인 판단이라고 봅니다. 메를로-퐁티에 따르면, 경험론은 지각에 용해되어 있는 지성적인 상부 구조를 절단해 냄으로써 지각에 용해되어 있는 본능적인 하부 구조마저 즉 감정적인 의미마저 절단해 냅니다. 그 반대로 지성론은 지각에 용해되어 있는 본능적인 하부 구조를 절단해 냄으로써 실상은 지각에 용해되어 있는 상부 구조 즉 실존적인 의미마저 절단해 내는 것으로 봅니다. 요컨대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지각 세계 즉 ‘우리가 살아내는 세계’는 온갖 형태로 구조화되어 있는 우리의 몸이 감각적으로나 지성적으로 뿐만 아니라 감정적으로 그리고 실존적으로 맞이하고 생활하는 세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에서는 흔히 감각 자료라고 말하는 순수 감각이나 칸트가 말하는 범주와 같은 순수 지성적인 개념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성적인 반성에 의해 구성된 것으로 비판됩니다. 그래서 순전한 감각을 바탕으로 구성되는 경험론의 세계, 순전한 지성적인 개념에 의해 구성되는 합리론의 세계, 그리고 순수 감각과 순수 지성적인 개념에 의해 세계가 구성된다고 말하는 선험 철학적인 관념론의 세계는 허구라고 비판하게 됩니다. 아울러 순수 물리학적인 지성에 의한 여러 개념들에 의해 구성되고 설명되는 과학적인 세계 역시 참다운 세계가 아닌 것으로 됩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메를로-퐁티는 인간의 지성에 의해 인간의 생물학적인 본능이나 인간 특유의 인간적인 고뇌가 담겨 있는 인간 실존을 무시한 채 오로지 지성적인 개념에 의해서만 구성되는 세계를 결코 참다운 세계가 아닌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암암리에 이러한 세계에 ‘오염되어’ 참다운 세계의 진실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6. 몸의 반성에 기초한 새로운 반성: 반성에 대한 반성
이쯤에서 우리는 긴박한 의문을 갖게 됩니다: 인간의 온갖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관여하고 있고 또 그로 인한 온갖 의미들이 용해되어 있는 바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지각 세계에 어떻게 철학적으로 진입해 들어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철학이란 고도의 지성에 의한 반성적인 작업이고, 그렇다면 지성에 의해 그 세계를 파고 들어가다 보면 어차피 지성의 틀에 얽매여 지성적으로 윤색된 세계만을 보는 데 그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메를로-퐁티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도대체 철학이란 지성에 붙박여 있기 때문에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세계는 운명적으로 철학의 범위를 벗어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너(Richard M. Zaner)는 이러한 의문을 바탕으로 메를로-퐁티의 현상학 역시 자기모순에 빠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메를로-퐁티는 이러한 문제점을 당연히 스스로 간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메를로-퐁티는 그러한 모순을 빠져 나올 수 있는 길을 역시 몸 현상을 통해 보이고자 합니다.
우선 메를로-퐁티는 몸 스스로가 반성하는 것을 보이면서 지성적인 반성의 원천이 바로 이 몸의 반성이라 말합니다. 몸에는 흔히 이중 감각이라 부르는 현상이 있죠. 예컨대 오른손으로 왼손을 만질 때 오른손은 지각 주체이고 왼손은 지각 대상이 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왼손이 지각 주체가 되면서 오른손이 지각 대상이 되기도 하는 현상 말입니다. 이를 결합해서 보면, 지각 주체인 오른손이 지각 주체인 왼손을 만진다는 것, 즉 주체가 주체인 자기를 대상으로 삼는 데서 일종의 몸의 반성이 생겨납니다. 이 같은 반성을 메를로-퐁티는 원초적인 반성이라 말합니다.
오른손과 왼손 간의 이중 감각은 설명을 위한 전형적인 현상일 뿐이고, 실제 몸 차원의 반성은 몸이 살아 움직이는 한 늘상 나타납니다. 몸으로부터 반성하는 지성적인 의식이 분리되어 나오기 전에, 몸은 이미 자기가 이루고자 목표를 위한 자세를 취하고 그 자세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스스로를 몸의 차원에서 이미 반성해서 그 자세를 바로 고칩니다. 메를로-퐁티에 따르면, 이러한 몸 차원의 원초적 반성에서 이차적으로 삐져나온 것이 지성적인 반성인데, 이 이차적인 지성적 반성을 마치 진리를 포착해 내는 원천인 양 여겨 여기에서부터 참다운 세계를 찾으려고 한 것이 유럽의 합리론적 전통에서 계승되어 왔고, 그 절정이 인간을 포함한 전 세계를 인간의 지성에 의해 구성되는 것으로 보는 칸트 류의 관념론적인 반성 철학이라는 것입니다.
메를로-퐁티는 이러한 관념론적인 반성 철학이 살아 있는 인간을 마치 지성적인 사유(cogito)의 편린인 양 잘못 왜곡시켜 놓았고, 또 살아 있는 몸과 상호 교환의 관계를 갖는 바 ‘우리가 살아내는 세계’를 사유 속의 세계 즉 이념의 세계로 잘못 왜곡하는 데 기여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잘못된 인간관과 세계관이 이미 현대인의 생활 속에 한껏 젖어들어 와 압박을 가한다고 봅니다.
이같이 왜곡된 인간관과 세계관에 젖어 있는 현대인들이 여기에서 벗어나야 히는데, 메를로-퐁티는 그 같은 벗어남에 철학이 기여하기 위해서는 우선 지성적인 반성의 형태를 완전히 바꾸어야 한다고 봅니다. 즉 그동안의 지성적인 반성의 폐해를 반성해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요컨대 반성의 목적은 반성되기 이전의 것을 있는 그대로 포착하려는 것이어야 하고, 할 수 있는 반성에 대한 반성’을 통해 반성되기 이전의 원초적인 상태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반성이 반성적인 태도 혹은 (자기 폐쇄적이어서) 공격불가능한 사유 속에 우리를 함몰시켜서는 안 된다. 반성은 반성에 대한 반성이어야 한다. (…) 우리는 그저 철학을 수행해서는 안 된다. 철학자는 그동안의 철학이 세계의 모습과 우리의 실존을 어떻게 잘못 변형시켰는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지각』)
한편, 근본적으로 새로운 철학을 건립할 수 있는 이 같은 새로운 류의 반성이 몸과 세계 사이에서 생겨나는 원초적인 현상을 해명하는 데 사용될 때 이를 메를로-퐁티는 실존적 분석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철학을 실존 철학이라 말할 때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간취하게 됩니다.
7. 나와 타인의 문제: 서로몸됨(상호신체성)
버트런트 러셀은 『철학의 여러 문제들』에서 일상적으로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 철학적으로 반성하기 시작하면 한없이 복잡한 모순에 빠져 든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는 철학이 자칫 잘못하면 얼마나 일상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황당한’ 생각의 체계를 세워 일상인들을 압박할 수 있는가를 간접적으로 일러 줍니다. 특히 철학이 말하는 존재론이나 인식론의 영역에 잘못 빠져 들면 일상의 생각들이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기 일쑵니다.
그런데 특히 현대에 들어 가장 일상적인 상식에 들어맞는 철학이 있다면 바로 메를로-퐁티의 철학이 아닌가 싶습니다. 일상적인 상식을 뿌리채 흔들어 무효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상식의 뿌리를 더 깊이 캐고 들어가 일상적인 상식을 풍부하게 만드는 철학이 메를로-퐁티의 철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메를로-퐁티의 철학도 어쩌면 일상적인 상식과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메를로-퐁티의 철학이 일상적인 상식을 벗어나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상식이 그동안의 지성 중심 혹은 이성 중심 혹은 정신 위주의 철학에 오염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잘못된 이론적인 사유의 꾐에 빠져 ‘고향을 떠나’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살이를 정신 위주로 생각한다는 것은 알고 보면 세상살이를 나를 위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를 ‘생각해 보면’(즉 정신적으로 반성을 해 보면) 마치 내가 나의 정신과 나의 육체로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착각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을 ‘지각하게 되면’, 그의 육체와 정신이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철학을 갈래짓는 두 입장을 보게 됩니다. 하나는 데카르트 식으로 나 자신의 정신에 대한 나 자신의 정신의 반성을 철학적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타인을 보거나 타인이 나를 보는 것을 철학적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런데 메를로-퐁티는 내가 나 자신을 보는 것보다 타인이 나를 보는 것이 더 근원적이고, 내가 타인의 시선을 통해 나를 보는 것이 더 근원적이라는 입장을 취하는 것 같습니다. 메를로-퐁티는 “‘나’는 다른 모든 나들의 교차점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나의 존재 혹은 나의 자기동일성은 오로지 타인들에 의존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나아가 이는 그 어느 것이든 순수한 자기동일성은 있을 수 없고, 실질적으로는 항상 타자성 내지는 차이성을 자신 속에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메를로-퐁티에서는 나에서 타인에게로 어떻게 넘어갈 수 있는가라는 이른바 ‘상호주관성’의 문제 혹은 유아론의 문제가 처음부터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는 내가 나의 오른손으로 나의 왼손을 만질 때 오른손과 왼손 사이에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왔다갔다 서로 교환되듯이, 내가 다른 사람과 악수할 때 그와 나 사이에는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왔다갔다 서로 교환된다는 점을 중시합니다. 이를 가능케 하는 원천적인 지반을 메를로-퐁티는 몸에서 찾습니다. 몸은 처음부터 상호주관적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을 상호신체성(intercorporéité)이라 부릅니다.
이같이 나와 타인 간의 혹은 나와 세계 간의 상호교환(어쩌면 상호교접이라 불러야 더 적당할 것 같습니다.)은 나의 주체(혹은 나의 시선)과 타인의 주체(타인의 시선) 모두를 원초적인 것이 아닌 것으로 만든다. 나와 타인 혹은 나와 세계 모두가 발생하는 존재론적인 원천을 메를로-퐁티는 '살'(chair)이라 부릅니다. 살은 너의 것도 나의 것도 아닌 근원적인 시선 즉 익명적인 시선을 가능케 합니다. 거기에서 나의 시선(주체)과 타인의 시선(주체)은 본래 하나인 셈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메를로-퐁티의 후기 사상을 담은『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중 특히 ⌈교직-교차⌋와 그의 예술론을 담고 있는『눈과 정신』을 통해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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