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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April 19, 2006

2006.04.20 Thurs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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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과 매체미학, 심혜련 교수와의 인터뷰
독일 평론가 발터 벤야민(1892~1940)의 '아우라' 개념과 복제예술에 대한 이론은 그가 세상을 떠난지 60 여년이 지난 현재의 예술가 및 이론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미학이론들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그는 예술작품의 원본이 지니는 시간과 공간에서의 유일한 현존성에서 도출되는 '아우라' 를 이야기하면서 이러한 현존성이 결여된 사진이나 영화와 같은 창작품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가져왔다. 즉 독특한 거리감을 지닌 사물에서만 발생하는 아우라는 복제품이나 대량생산된 상품에서는 경험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단순하게 예술작품을 복제만 한다기 보다는 그것을 변형하여 재생산하기에 이르렀고, 미술계 역시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혼란한 상황이다. 이러한 때에 우리가 정체성을 찾고 나아갈 방향을 정립하기 위한 한가지 방법은 인문학적 개념정리를 통한 상황의 해석이라고 본다.
현재 홍익대학교에서 매체미학을 강의하고 있는 심혜련 교수를 통해 벤야민 이론에 대해 다시 되짚어보고 그의 견해를 들어보고자 인터뷰를 청하였다.


윤상훈 : 현재 사이버 미디어와 관련된 강의를 하고 계신데, 강의의 주된 내용은 어떤 것입니까?

심혜련 : 주로 미학, 예술과 관련해 매체 미학을 다루고 있습니다. 매체 미학은 기존의 전통적인 미학이론이나 예술론으로는 현대 매체 예술을 분석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매체 예술은 이전의 전통적인 예술과는 예술 형식도 다르고, 매체, 즉 기술이 차지하는 위상도 다르고, 특히 수용 방식도 많이 다르기 때문에 전통적 예술 이론으로는 현대의 매체 예술을 설명하고 평가하기가 어려우니깐, 지금은 매체 예술을 설명해낼 수 있는 이론적 틀에 대한 탐구가 바로 매체 미학의 주요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미학이 아름다움에 관한 이론이나, 예술에 대한 철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미학의 어원적 근원인 희랍어 “아이스테시스(aisthesis)”의 본래적 의미인 감성, 지각에 관한 이론이어야한다는 것이 매체 미학의 기본 전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의 규정에 따르면 미학은 일종의 ‘감성적 지각 이론’, ‘감성학’ 등이 되는 거죠.
이런 기본전제에서 매체 미학의 기본이 되는 사상, 즉 벤야민, 맥루한 등을 다루고, 또 구체적인 매체 미학의 이론들, 즉 볼츠, 바이벨, 벨쉬 등등의 이론들을 예술과 관련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매체 미학이 아직 진행중인 이론이라서 수업시간에는 그냥 다양한 이론들을 접하고, 학생들과 매체 예술과 매체 미학에 대해 여러 가지 문제를 생각해보고 토론하기도 하지죠.


윤상훈 : 벤야민과 관련된 논문을 많이 발표하셨는데요 현대의 예술이나 미학에 있어서 벤야민의 이론들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특별한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심혜련 : 벤야민은 현대 예술론과 미학, 그리고 대중 문화론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가지 점에서 그러하다고 생각하는데, 몇 가지만 지적해보면, 우선 벤야민은 20세기 초 대중 문화가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낼 때 살았던 사람입니다. 대중 문화의 발전기에서 대중 문화를 철학적 미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삼고 연구를 시도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그 당시 다른 많은 이론가들은 결코 대중 문화 현상을 학문적 주제로 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대중 문화는 그냥 저속하고 통속적이고 오락적인 문화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물론 대중 문화 현상을 학문적 주제로 삼아 연구한 사람들이 벤야민 외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의 대부분은 대중 문화 현상을 부정하고 비판하는 입장에서 논의를 전개한 것이기 때문에 벤야민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러한 대중 문화에 대한 벤야민의 관심은 바로 일상성에 대한 미학적 추구에서 기인한다고 봅니다. 즉 우리가 대도시 곳곳에서 접할 수 있는 사물과 이미지들에서 철학적 미학적 계기들을 찾은 것이지요. 이런 벤야민의 시도는 일상성의 미학, 또는 대중 예술의 미학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굉장히 앞서간 시도라고 볼 수 있지요.
또 특히 매체 미학과 관련에서 벤야민의 이론은 아직도 유효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벤야민이 1920년대와 30년대의 변화를 보고 이 시대를 ‘기술 재생산 시대’라고 규정했습니다. 이 시대에 적합한 예술 형식은 전통적 예술 형식인 회화가 아니라, 사진, 영화 더 나아가 광고 등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렇게 주장한 전제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벤야민은 예술 작품을 철저히 사회적 산물로 파악합니다. 따라서 사회가, 특히 사회의 기술적 발전 수준이 바뀌면 예술 작품의 형식도 바뀌고, 또 예술 작품의 형식이 바뀌면 그 예술 작품을 수용하는 수용 방식도 바뀐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벤야민의 기본 전제는 현대 매체 예술을 설명하는데 기본 축이 될 수 있습니다. 즉 벤야민이 살았던 시대가 기술 재생산 시대라면, 지금은 또 다른 시대입니다. 디지털 매체 시대라고 할까요. 그러면 이 시대에는 이 매체의 방식에 상응하는 예술 형식이 새롭게 등장할 것이고, 또 이 새롭게 등장한 예술 작품을 수용하는 방식도 바뀌겠지요.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매체 미학의 기본 전제는 수용자 측면에서의 예술 작품의 ‘지각’문제인데, 이것을 이미 벤야민이 사진과 영화에 관련된 논의에서 이것을 탐구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벤야민의 논의는 아직도 많은 것들을 줄 수 있는 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윤상훈 : 사진, 광고, 영화등의 변형된 예술의 등장을 벤야민은 '아우라의 몰락'이라고 명명하여 이러한 새로운 형식의 예술은 기술 재생산 시대 이전의 예술작품과는 다른 지각방식을 요구한다고 말했습니다. 벤야민이 말한 '다른 지각방식'이란 어떤것이고 '대중예술은 저급하다'는 일반적인 통념속에서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그것들을 받아 들여야 할까요.

심혜련 : 요즘 아우라라는 개념은 번역이 필요없는 하나의 새로운 유행적 언어가 된 것 같습니다. 신문과 잡지 등에서 쉽게 아우라라는 단어를 볼 수 있으니까요. 벤야민이 사진, 영화 그리고 광고 등을 미학적 학문의 대상으로 주목하면서 ‘기술 재생산시대의 예술 작품’이라는 개념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술의 특징을 ‘아우라의 몰락’ 또는 ‘아우라의 상실’이라고 규정합니다. 일단 이 논의의 전제는 예술은 사회적 산물이므로, 사회가 변화면 지배적인 예술 형식도 변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예술 형식으로서의 사진과 영화를 주목하는 것이지요. 벤야민 시대에 다른 이론가들은 사진과 영화의 수용 방식에 문제를 삼으로 이것은 예술이 아니라라고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벤야민은 새로운 예술 형식은 새로운 지각 방식을 요구한다고 합니다. 즉 전통적 예술 작품, 대표적으로 회화는 몰입, 집중, 관조와 침잠 등을 대표적인 지각 방식으로 요구합니다. 그러나 벤야민에 따르면 사진과 영화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전통적 지각 방식과는 다른 지각 방식, 즉 정신오락적 분산적 지각 방식에 더 적합한 것이라고 합니다. 특히 영화는 회화와는 다르게 움직이는 그림입니다. 움직이는 그림은 일차적으로 그림이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수용자의 연상이 고정될 수 없다고 합니다. 즉 화면의 그림의 움직임과 더불어 수용자의 연상 작용도 움직이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 과정에서 분산적 지각 형태가 드러난다고 합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오락적 성격이 강한 대중 예술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합니다. 벤야민은 예술의 기능 중에서 예술이 가지고 있는 오락적 기능, 즉 즐기는 기능에 주목합니다. 예술은 즐기는 것이고, 따라서 일상성에서 충분히 예술적 대상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벤야민은 예술이 예술의 자율성이란 이름으로 사회와 대중과 멀어지는 현상을 우려했던 것입니다. 대중 예술이란 형태로 일단은 일반 대중이 예술에 접할 수 있는 길이 확대된 것을 높이 평가하는 것입니다. 즉 ‘예술작품에 대한 민주적 접근 가능성의 확대’가 벤야민이 대중 문화를 통해 보려고 했던 첫 번째의 긍정적 계기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대중 문화와 대중 예술은 저급하니깐, 학문적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주장에 반대하면서, 대중이 즐기는 문화와 예술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해보자고 하는 것이지요. 이런 태도는 아직도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벤야민 이후에 대중 문화론과 대중 문화와 예술의 상관 관계에 대한 논의들이 바로 이런 입장에서 시작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윤상훈 : 벤야민이 말한 ‘아우라의 몰락’이후 또 시대는 많이 흘렀습니다. 대중예술을 놓고 볼때 대중예술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또 다른 경계가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영화의 경우 일반 상업영화와 단편예술영화를 분리하듯이 말이죠. 그렇다는 것은 벤야민 이후 또 다른 아우라의 몰락이 시작되었다는 의미 일까요? 그렇다면 벤야민의 이론은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겐 적용이 되지 않는건가요?

심혜련 : 그것은 아우라의 개념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벤야민이 사진과 영화, 더 나아가 광고라는 것을 새로운 예술형식으로 봤던 시대는 기술재생산의 시대였던 거죠. 지금은 디지털 미디어 시대, 정보매체 시대입니다. 벤야민의 이론이 현시대도 유효하다고 말하는 것은 벤야민의 이론이 그대로 정확히 맞는다는 것이 아니라 문제설정 방식과 접근방식이 유효하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예술은 사회적 산물이다라는 것은 벤야민의 제1전제입니다. 예술은 사회적 산물이기 때문에 사회적 현상관계가 바뀌면 예술 형식도 바뀐다는 의미죠. 전통적인 시대에서는 회화, 조각 등이 대표적인 예술형식이었고 기술재생산 시대에서는 사진,영화등이 대표적 예술형식이었고 그렇다면 사회적 산물로써의 예술이 디지털 매체 시대에는 어떠한 새로운 예술형식으로 등장할 것인가 라는 것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이 기본적인 이론의 틀이 될 수 있습니다.
벤야민의 이론을 그대로 가져와서 지금의 예술형식에서 아우라가 있느냐 없느냐 내지는 지금의 예술형식이 정신오락적 분산적 지각 방식을 요구하느냐 혹은 몰입, 집중, 관조와 침잠을 요구하느냐는 따질수 없는 문제인 것입니다.
벤야민이 관심을 기울였던 부분은 이미지 복제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미지 복제가 화두가 아니라 이젠 이미지 변형의 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이미지 변형의 시대에서는 수용자의 역할이 커지는 것이죠. 단순한 수용자로서의 적극적 태도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수용자가 적극적으로 참여를 해야만 작품이 완성되는 시대입니다.
현대에 와서 아우라의 개념은 확실히 달라졌습니다. 벤야민 식으로 풀이를 한다면 대중문화, 대중음악 등에는 아우라가 없어야 하는데 사실 우리가 영화를 보고난뒤나 대중음악 콘서트 장을 찾고나서도 확실히 무언가 느껴지는 아우라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벤야민이 이야기했던 아우라와는 좀 다르게 현재에서 논의되는 아우라는 작품의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시대에 따라 함께 변천된 아우라의 개념이 요즘에 와서는 카리스마라는 의미와 조금은 통용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결론적으로 벤야민의 논의가 유효하기 위해서는 디지털 매체에 걸맞는 새로운 예술형식은 무엇이고 수용방식은 무엇인가를 우선적으로 따져 봐야지만 아우라에 관한 이론의 틀이 따라갈수 있다고 봅니다.


윤상훈 : 벤야민이 굳이 아우라의 ‘몰락’ 이라는 표현을 썼던 것은 기술 재생산 시대를 경험하면서 사진이나 영화로 인해 앞으로 차차 회화나 공예작품등이 영원히 사라져 버릴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느껴지네요.

심혜련 : 아닙니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예술의 역할과 기능이 변하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벤야민이 사진이라는 새로운 예술형식을 접했을때 그는 사진이 예술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진의 도입으로 인해 기존 예술계에 닥쳐올 변화가 무엇이냐에 주목을 했다는 것입니다. 복제된 형태라도 예술작품을 접하게 되었을때 일반 대중도 예술에 대한 태도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가를 주목했던 것입니다. 그때 당시만 해도 일반 서민은 예술작품을 전혀 대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죠.


윤상훈 : 벤야민은 그럼 그때 당시엔 ‘아우라의 몰락’에 대해서만 언급을 한건가요? 아우라의 재생산이라든지 유지에 대해선 전혀 언급을 하지 않았었나요?

심혜련 : 벤야민의 아우라의 몰락에 관한 입장이나 태도에 대해선 사람들에 따라 해석이나 의견이 매우 분분합니다. 어떤이는 벤야민이 아우라의 몰락을 상당히 안타까워 했다고도 말하는데 저는 그렇게까지 보지는 않습니다. 어찌되었건 벤야민이 상업적인 마케팅적 측면에서 만들어진 아우라에 대해 확실하게 명시를 하기 때문에 벤야민 이후에 벤야민을 연구한 이론가 들이나 후배들 같은 경우에는 그때 나타나는 아우라는 벤야민이 말한 아우라가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아우라라고 말합니다.


윤상훈 : 그렇다면 단지 경제적 이득을 얻기 위한 상업적 가치만을 추구하는 대중예술과 벤야민이 말한 일반 대중들과의 괴리감을 좁혀가기 위한 의미로서의 대중예술은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궁금하군요.

심혜련 : 벤야민의 이론은 일차적으로는 상업적 가치 추구로서의 대중예술도 포함은 합니다. 일단 벤야민이 가장 중요하게 언급하고자 했던 것이 예술의 자율성이라는 부분이었기 때문이죠. 예술의 자율성이라는 개념 아래에서 예술을 자꾸 포장하고 대중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거리가 있는 작품이야 말로 무언가 심오한 뜻을 가지고 있고 훌륭한 작품이라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대중과 친밀하고 이해하기 쉬운 예술작품과 연관된 논의도 포함하는 것이죠. 기본적으로 벤야민은 예술이 여러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 오락적 기능도 매우 중요한 기능일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시사합니다.


윤상훈 : 컴퓨터를 이용한 다양한 매체의 등장으로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어도 미적(美的) 감수성만 가지고 있다면 원하는 미술작품을 창조해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존에 회화, 조각 등 고전적인 미술교육을 받은 이들은 영상 테크닉을 배우기 위해 애쓰기도 하고요.
그러나 이러한 현상이 때로는 열린 예술, 예술의 자율성이라는 미명 하에 우연적 효과와 찰나적인 재치만이 남발하는 영상, 설치 작품들로 드러나기도 하고, 영상예술은 넘쳐나는데 갈수록 순수회화는 설 땅을 잃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재 미술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심혜련 : 일단 영상 예술과 순수 회화를 딱히 구별해 낼 수 있을까라는 문제인데... 비디오 아트, 즉 비디오 설치나 비디오 회화는 순수 회화의 범주에 집어넣을 수 없는 건가요? 집어넣을 수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렇다면 빌 비올라의 작품은 회화는 아니지만, ‘순수’가 아니라고 볼 수 있나요?
저는 영상 예술과 순수 회화라는 구분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영상 예술과 평면 예술이라고 구분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순수’라는 말이 가진 폐쇄전인 느낌을 싫어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말 그대로 ‘순수 회화’로 계속 작업을 하다보면, 저는 작가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추측해보면, 표현의 한계를 느끼고, 자꾸 더 잘 표현할 수 있기를 원하지 않을까요? 즉 표현 영역의 확장을 시도하면은 자연스럽게 새로운 기술적 매체로 눈을 돌리게 될 것 같습니다. 자연스럽게 표현 도구를 바꾸게 되겠지요. 그러나 지적하신 문제들은 저도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찰나적인 재치만이 있고 진중함과 깊이가 없는 영상 작업들의 난발을 우려할 수 있다고 봅니다. 아니, 우려해야지요. 기술적 숙련과 재치만을 앞세운 작품들에서 우리는 흔히 예술적 깊이와 감동의 부재를 봅니다.
그러나 이 문제도 대답하기에 쉬운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결국 이 문제에 대해 들어가 보면, 예술이 무엇이냐하는 아주 기본적인 개념 정의 문제로 들어갈 수밖에 없으니까요. 예술에 깊이와 감동 또 진지함과 비판 정신 등을 기대하지 않아도 된다고 보면,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되는데... 결국은 예술의 종말에 대한 담론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는데요. 어쨋든 개인적으로 저는 매체 예술이 예술이기 위해서는 예술적 깊이와 감동이 있어야된다고 생각합니다. 매체가 가지는 형식, 또 기술적 측면과 컨셉트적인 면으로 예술 작품이 구성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비록 고루한 예술관이라 할지라도 저는 아직은 그렇습니다.


윤상훈 : 그렇군요. 예술을 이것 저것으로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무의미할 수도 있는 문제겠네요. 혹시 전시기획과 관련된 일을 하실 계획은 없으신가요? 사이버 미디어나 영상매체에 관련된 전시를 인문학적 내용을 기반으로 기획하신다면 대중들에겐 아주 흥미로운 전시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심혜련 : 안그래도 사실 이번해에 전시를 하는 몇몇 작가들이 평문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긴 했지만 아직까지는 이론적인 작업을 하고 싶어요. 제가 볼때는 미술이라는 굴레 안에서 인문학적 논의를 충분히 끌어나갈 수 있다고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언급은 많이 하지만 깊이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현대의 미술비평에서 많이 언급되는 사상가들에 대한 사상적인 측면들을 한번 훑어보고 정리하고 싶어요. 하이데거, 메를로 퐁티, 니체 등등의 사상을 미술이라는 매게와 연결해서 공부하는 작업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전 실무를 잘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이 없어요. (웃음)


윤상훈 : 마지막으로 선생님께서 추구하시는 학자로서의 최고의 가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심혜련 : 아직 전 제자신을 학자라고 까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웃음) 그저 연구하고 공부하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합니다. 아직까지는 부족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언젠가는 나만의 예술이론을 갖출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은 거죠. “누구누구의 이론에 의하면” 이 아니라 “나의 예술이론에 따르면”이라고 당당히 이야기 할 수 있는 존재가 되고싶습니다. 지금의 몇배가 넘는 노력을 해야겠죠. (웃음)


윤상훈 : 선생님과의 인터뷰를 통해 벤야민과 그의 이론들에 대해 한걸음 접근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바쁘신데 시간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심혜련 : 감사합니다.



약 력
1988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졸업
1992 숭실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
1993 베를린 자유대학 철학과 입학
2000 베를린 훔볼트대학 미학과 박사과정 졸업
현재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겸임교수

이미지 설명 (위에서 부터)
발터 벤야민 사진
심혜련 교수 사진
신디셔먼 / 무제 (마릴린 먼로)
파리 퐁피두 센터 전경 (롤랑 바르뜨展)
빌 비올라 / The Silent Sea / 2002
백남준 / 다다익선 / 국립현대미술관


인터뷰 / 정리 : 윤상훈 (오픈아트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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